입추라고 적혀있던 날
살다 보면 아주 죽을 만큼은 아니고,
우울해서 금방이라도 바닥에 딱 붙어버릴 만큼 또한 아니고,
그저 적당히 울적해지는 날이 있다.
하루 속에서 묵묵히 수행해내는 일련의 과정들이
특별히 빛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괴로운 것 또한 아니었으나
적당하고 별스럽지 않은,
그래서 대놓고 울상 짓기도 멋쩍어
'그냥 좀 울적하다' 쯤으로 마무리해야만 하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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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에 어쭙잖은 위로의 말 대신 나를 태우고
15분을 차로 달려갈 수 있는 카페에 가주는
당신에게 감사하다.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15분의 거리.
그 카페의 커피는 5천 원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치고는 비싼 편이지만
나는 이 맛을 좋아하고 그래서 싸지도 비싸지도
않게 여긴다.
우리는 오며 가며 별 말이 없다.
그저 앞질러가는 주인 모르는 차들의 번호판을
눈으로 익히는 무의미한 행동을 할 뿐이다.
4701 3823 4576 6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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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별말 없이 5천 원짜리 커피를 사고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울적함은
딱 그 크기만큼의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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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는 마침 선선해진 날씨 덕분에
내친김에 '내일은 좀 기운을 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런 호기로운 마음은 다음 날이면 뜨거운
8월의 땡볕에 보기 좋게 내팽개쳐지기도 하지만
달력에 '입추'라고 쓰여있으니,
뜨거운 날씨도 저녁이면 입추다운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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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 무엇으로든 위로라고 불리는 것을
주고받지만 적당한 위로는 어렵다.
크기에 딱 맞추지 못하면 하나마나받으나마나,
어쩐지 입맛이 깔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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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해진 가을에 날씨야 마음을 이리저리 잘도
휘두르며 쓸어내려준다만,
나는 크기에 알맞은 위로를 건네기엔
아무래도 센스가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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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사랑이 부족한 걸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