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에는 걷는다는 표현이 열 개도 넘는데 그중 '플라느리'는 '일상의 생활에서 짧은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넓지 않은 범위를 한가롭게 기분 좋게 걷는 행위'를 말한답니다. (정수복, '파리를 생각한다' 중)
나도,
플라느리(Flanerie)하고 싶다. 명예의 굴레와 세상사에서 벗어나 강호를 소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량항에서. 풍경이 수려해 <마량미항>으로 불린다는 전남 강진의 항구에서. 밤새 무더위는 날벌레처럼 성가셨고, 새벽 낚싯배들이 소란스러웠던 항구에서의 차박이었다. 잠을 설친 등대를 아침 해가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름난 출사지를 찾아 남들처럼 찍어보고 있지만 이제는 초보사진가의 딱지를 떼야할 때. 내가 사는 동네, 일하는 직장, 그리고 출장으로 찾은 마을... 조금만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면 모든 곳이 출사지인 것을. 아버지 병을 치료하려고 '삼 년 묵은 쑥'을 찾아 수십 년을 헤매다 통곡했다는 효자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그래 멋진 풍경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널려 있는 쑥을 묵히면 되는 것처럼, 내 주변의 풍경들을 찍고 또 찍으면 멋진 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플라느리'는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가롭고 기분 좋게 살자는 인생의 걸음에 대한 표현이 아닐까?
아침 해가 뜨면,
불안해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다. 그는 어제와 같은 오늘, 비루한 일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늘 기진맥진해한다. 반복되는 '시작'에서 도망치고는 싶은데 스스로 '끝'을 선택할 용기는 없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나는 해뜨기 전에 집을 나서면 가슴이 설렌다. 오늘을 어제의 오늘이라 생각하면 지루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미 살아 본 오늘이라면 어제보다 더 잘 살 수 있고, 어제와 다른 오늘이라면 또 새롭게 살면 되니까.
그런 때가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던 시절이. 요즘은 출퇴근 시간이 고작 2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것도 뛰어가면 1분이지만. 몇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근무지를 서울로 옮겨, 세종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해야 했다. 원룸을 얻을까 고민도 했지만 첫 버스와 통근열차를 이용하면 출퇴근이 불가능하진 않았다. 새벽 버스와 열차로 연결되는 상경길을 나는 여행길로 생각하기로 했다. 날마다 여행이었다. 여행은 즐거운 거니까. BRT 20분과 KTX 50분, 기다리는 시간까지 얼추 90분 정도 되는 초단기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차 안에서 수면을 보충하거나 벼르던 영화를 보았다. 출근 때 보기 시작한 영화가 끝나고, 극장처럼 BRT 버스 실내등이 켜지면 나의 퇴근도 끝이 났다. 가끔은 찔끔 흘린 눈물을 훔치며, 때로는 소리 없이 웃다가, 한 편의 영화 같던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그러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는 브런치 나우에서 새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날마다 작성되는 글의 양이 꽤 많은 편이라 부지런히 읽어야 열차가 도착하기 전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솜씨 부린 글보다 고뇌한 글을 좋아한다. 발행 버튼을 누르기까지 계속되었을 완결성에 대한 작가의 고심에 마음이 끌린다. 그런 글을 만나는 출근길은 정말 즐거웠다. 나의 출퇴근 여행은 날마다 같은 경로를 이동했지만,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짧든 길든 무수한 여행을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도 얻었고. 그땐 몰랐지만, 결국 나는 출퇴근길 내내 한가로이 '플라느리(Flanerie)'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