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꿈틀거리며 아이들에게 꿈 틀 꺼리 주고 싶었다.
❚ 다른 두 아이, 다른 교육 그러나 답답한 교육
대한민국 공교육에 몸을 담은 지 거의 16년이 되어갈 무렵, 그 당시 우리 첫째는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는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1학년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첫째가 7살이던 해, 다니던 유치원을 그만두고, 동생이 다니는 어린이 집으로 전학을 시켰다. 남들은 어린이 집에서 유치원으로 업그레이드 시킬 판에 나는 다운그레이드를 시킨 셈이다. 물론 남들이 하는 선행 학습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고 매일 먹고 노는 그런 어린이 집에 두 남매를 등원시켰다. 우리 딸은 그 1년을 아주 행복해 했다. 지금도 그 선택은 내가 인생에서 택한 여러 가지 선택 중에 아주 잘 한 것 중에 하나라 생각한다. 하지만,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 하면서부터 이미 선행을 단단히 한 친구들에 비하면 열등생이었다.
한편, 나름 학구파인 둘째는 약간 다르게 키워 보려했다. 글자 공부, 수 공부를 하나도 안하고 학교를 간 누나였지만, 이 둘째는 좀 더 학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둘째는 인근에서 추첨씩이나 해야 들어갈 수 있는 유치원에 보냈다. 그곳은 간식과 점심시간 외에는 몬테소리식 교육이라는 손으로 하는 노작활동이라는 것을 주로 시키는 유치원이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둘째는 그 유치원을 너무 재미없어했다. 그 유치원을 보낸 이후로 까불까불하던 성격도 사라지고 뭔가 아이 같은 느낌도 잃어가는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난 꾸역꾸역 2년을 보냈다. 두 아이를 다르게 키운 나로서는 두 가지 모두 다 답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묘안은 없이 그저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이었다.
❚ 우리 아이들의 일상에 나는 숨이 막힌다.
오랜 세월,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의 일상 생활이 너무 우울해 보였다. 거의 하루에 10시간이상을 의자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 처지인데 다가, 끝없는 선행을 해야 그나마 뒤쳐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스트레스를 안으로 품어서 병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이 간혹 있었다. 또는 스트레스를 밖으로 뿜어내서 병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 또한 자주 보였다. 그 중간에 놓인 보통의 아이들은 또 그런 친구들에게 치이며, 자신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표현할 자유도 없이, 그저 꾹꾹 누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공부만 가지고 한 줄 세우는 그런 학교가 참 안타까웠다. 비록 교사이지만, 그 제도 안에서 시녀 역할을 하는 처지일 뿐 어찌 달리 할 방법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저 줄만 잘 세워 주면 좋은 교사인 듯이 느껴졌다. 나는 줄 세우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그 하나 밖에 없는 그 줄에서 선두에 설 것 같지도 않았고, 선두에 서게하기 위해 선행에 선행을 시키는 그런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뿐인 유년 시절에 아이는 아이답게
우리 두 아이의 미래가 저런 거라면 난 그 길 말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내가 누렸던 생명력 넘치던 유년 시절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었다. 어린이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뛰어다닐 자유, 생각을 맘껏 표현할 자유,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클 수 있는 권리, 서로에게 폭력성이 아닌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을 권리,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년 시절 시골에서 얼굴이 새까매지도록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녔다. 매일 친구와 한 시간 덜컹 거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그 하굣길 그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매주 토요일은 그 버스비로 과자를 사먹고 친구들하고 산 하나를 넘어 집으로 걸어올 때도 마냥 즐거웠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난 그런 줄 몰랐다. 내 친구 집이나 우리 집이나 뭐 다 비슷비슷했기에 난 주눅이 들거나 부끄러워 할 일이 없었다.
나의 그런 유년 시절이 나에게 늘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릴 정도로 뛰어다닌 덕분에 나의 체력은 나중에 공부를 할 때도 큰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잘난 친구들이 별로 없는 시골에서 자란 탓에 나는 내가 잘 난 줄 알고 살았기에, 나의 단단한 자존감은 왜만한 좌절의 순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난 나의 그런 유년 시절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주고 싶었다.
다행히, 미국에서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12시 30분이면 하교를 했다. 그리고 방과 후 1시간은 잔디밭인 학교 운동장에서 실컷 친구들하고 노는 시간이었다. 내가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피크닉 테이블에서 나와 같이 먹고, 우리 두 아이는 그 곳에서 현지 아이들과 뛰어놀며 건강한 시절을 보냈다. “평소에는 얌전한 어린이인데, 그 넓은 잔디밭에서 미식축구(football)을 할 때는 정말 새끼 무소처럼 빡쎄다” 지켜보던 미국 현지 학부모가 우리 아들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감사하게도, 우리 두 아이는 학원 숙제나, 선행공부에 짓눌리지 않고 신실한 크리스찬 학교 교육만을 받으며 마음 넓히는 공부에 몰두한 시절을 보냈다.
❚ 생고생 영어 학습(learning) 대물림 대신 의미있는 영어 습득(acquisition) 시키기
두 번째로 내가 조기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내가 겪은 고생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안 물려주고 싶은 부모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얼굴 새까맣게 그을리게 밖에서 뛰어놀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이 되었다. 아무 준비 없이 올라간 중학생인 나에게 영어는 늘 미스테리한 과목이었고, 내 발목을 잡는 과목이었다. 교사가 된 지금도 여전히 ‘영어는 자신 있어’ 라고 할 수 없다. 알면 알수록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사실 지금은 절대 원어민처럼 될 수도 없는 외국인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해도 해도 원어민처럼 될 수 없으니, 이제는 그 불가능을 받아들이고 속이라도 편하게 있으려고 한다. 약간은 베짱을 부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만큼은 나처럼 느림보 거북이 걸음의 영어 공부를 끝없이 하게 하기는 싫었다.
그런 나의 작은 바람은 사실, 아들이 아기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둘째인 아들은 책을 좋아했다. 태어나서 3살 때 까지 육아 휴직을 하면서 매일 1시간을 영어 동화책을 읽어줬다. 신기하게도 그 당시 아들은 그 한 시간을 꼼짝 안하고 듣고 있었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책을 나에게 던져서 읽으라고 까지 했다. 나는 잠시 우리 아들이 bilingual (이중 언어 사용자)도 될 수 있겠다 하고 섣부른 기대까지 했었다.
그러나 모든 전문가들이 말하듯이 외국어 습득에는 결정적 시기라는 게 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 즘 그 시기가 끝이 난다. 그때부터는 모국어의 input(듣게 되는 말)이 엄청 늘어나고 아이의 사고력이 발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아이는 모국어에 의존하며 사고를 발달 시킨다. 그리고 잉여 적인 외국어에 대한 흥미를 잃고 자신의 사고 발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국어에 집중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사고력에 좀 더 편한 언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게 대체로 인풋의 양이 많은 언어이고, 모국어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내가 알기로 두 개 언어를 비슷한 비율로 발달 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외국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가 끝나기 전에 영어의 인풋이 풍부한 장소로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싶었다.
❚생각을 예리하게 전달하는 칼날보다, 다른 문화 사람의 생각을 진정으로 담는 넓은 그릇 빚기
세 번째 조기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예리하게 전달하는 칼날 같은 도구를 갖게 하기보다, 다양한 문화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진정으로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을 가지게 하고 싶었다. 내가 했던 영어 공부, 그저 책으로 달달 외우는 영어였다. 그래서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온전한 이해가 힘든 부분이 참 많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생활에서 부딪치면서 일상과 경험으로 그네들의 문화까지 익히는 언어 습득을 하게하고 싶었다. 자신의 생각의 폭을 넓히는 언어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넓히는 도구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우리 아들에게도 그런 모국어 편향 현상이 생기면서, 우리 아들은 영어로 말하는 나를 완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아예 영어 책 읽어 주는 것을 싫어했다. 영어에 담을 쌓았다. 대신, 학교 도서관에서 우리말 책을 폭발적으로 읽어나갔다. 1학년 끝날 무렵 교내 다독상을 받을 만큼 책 읽기를 즐겨했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에 목을 말랐던 듯이 책 읽기에 몰입했다. 나중에 미국에 건너가 살면서 첫 두 해 동안, 우리 아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넓힐 도구인 영어를 향상 시키기 위해 또 영어 책 읽기에 몰입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즐기는 둘째의 성향에 언어는 참 필요한 생존 도구였던 모양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신의 능력과 필요에 맞게 각자 그릇 크기를 다르게 빗었다. 말수가 아주 적은 우리 첫째, 딸은 한국에 있을 때도 미국에 있을 때도 책 읽기나, 영어 능력을 향상 시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시큰 둥 하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다 내가 한 그 느린 거북이 걸음 같은 “학습(learning)”대신, 좀 더 의미 있는 “습득(acquisition)”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현지에서 좌충우돌 적응기를 거치면서 자신과 다른 배경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담는 그릇을 넓히는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마냥 즐겁고 유쾌한 시기는 아니였지만, 그 매일은 하나 하나 의미있는 과정이었다.
❚ 가족은 늘 함께해야 하는 동물적 본능
홀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주변의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 염려되는 상황들을 안고 있었다. 내가 현지에 가서 만난 한국인 남매 역시 부모 없이 홀로 조기 유학을 온 케이스였다. 엄마는 나처럼 중등 영어 교사였다고 했다. 그 남매는 먼 친척 집에 와서 살고 있었다. 중1 오빠와 초6 여동생이 부모 없이 온 상황이었다. 오빠는 학교 수업이나 과제를 따라가지 못해서 교과 선생님도 그 애를 포기한 상태이고, 여동생은 머리가 늘 떡이 져 있었다. 나는 너무 안쓰러웠다. 한국에 있는 그 엄마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일 텐데, 이런 현지에서의 자녀들의 모습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미국에서 좋은 교육 받겠거니 스스로 위안을 하고 있겠지 생각했다. 또 혼자 유학을 온 여고생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친구 관계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혼자 달래는 것을 봤다. 웬만한 성격의 여학생이 아니고서는 쉽게 우울감을 느끼기 쉽다.
나는 일찍 부모 곁을 떠나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덕분에 누구보다 독립심을 키웠지만, 나는 절대 내가 겪은 그 공허함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늘 함께 하려는 거의 동물적인 본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족은 어디에서라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교육지하룻밤지대계’로 보람있는 생고생하기로했다.
결국, 우리 아이들에게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유년시절, 우리 아이들을 아이답게 키우고 싶고, 의미있는 영어 습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을 키우게 하고 싶어서 남편과 함께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하룻저녁에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남편이 같이 간다고 하기에 나는 두 번 더 묻지도 않고 그럼 가자했다. 그리고 유학 휴직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고 마지막 보루인 그걸 쓰기로 했다. 결국, 나는 공부하는 엄마가 되기로 자처하고 길을 나섰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박사학위까지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에 할 수 있는 최고치를 다하다 보니 어느 덧 내가 그땐 미처 보지 못 한 만큼 멀리까지 와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함께 떠나는 조기유학을 결심했다.
* 저의 이야기를 동영상으로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