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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좋아 보이는 렌즈

렌즈 너머 보이는 허상과 내가 겪은 실체

by Hey Soon


❚ 이국적인 풍경

우리 아이들은 첫 날 밤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정원에 있던 야자수 나무는 우리를 이국적 정취에 빠지도록 하는 데 충분했다. 들뜬 마음으로 우리 집 막내는 벌떡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 봤다. 1월이지만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봄은 이미 와 있는 것 같았다.


❚ 신용불량자 Day #2

첫 주말을 보내고 새로운 주가 시작 되었다. 첫 월요일에는 한국은행에 계좌를 열려고 갔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의 은행은 사람도 많고 직원도 많고 뭔가 모르게 빠르게 돌아가는 그런 분위기가 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은행은 그 반대였다. 직원도 몇 안 되고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마치 아늑한 커피숍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경비원이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런 신용점수가 없는 나는 신용카드 발급이 불가능했다. 신용카드를 사용해서 포인트를 누적해서 공짜로 한국 여행을 다닌다는 많은 한국인들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일이 아예 불가능했다. 6000달러정도의 예치금을 맡기고서야, 겨우 직불카드에 해당하는 데빗(debit)카드 정도는 발급 받을 수 있었다. 학생 비자로 온 나였지만, 자유출입식의 계좌도 만들 수 있고, 체크북 (수표 모음)은 살 수 있었다. 내 계좌에 연결된 그 수표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빠르게 돌아가던 한국은행 시스템과 달리 미국에서 은행은 아주 느리고 고전적이었다. 폰이나 인터넷 뱅킹으로 계좌 이체를 주로 하며 일상을 보냈던 나로서는 미국사람들이 쓰는 수표가 소꿉놀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많은 중요한 비즈니스 거래가 이 수표에 액수를 기입하고 서명을 한 후 건네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나만의 예쁜 체크 북을 만들어 주문하는 온라인 사이트도 많았다. 나는 아이들 학비는 자동 이체를 시켜 두었지만, 매주하는 방과후 스포츠 수업이나 돌봄 교실비는 매달 액수가 다르기 때문에 수표를 써서 학교 사무실에 제출하였다. 참 신기한 일이다. IT 기술의 선두를 지키는 미국이지만, 거대한 땅의 어마한 인구 전체를 선진화시키기에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한 듯, 미국은 상반된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 뭐든지 좋아 보이는 렌즈

그날 오후, 동네 지리도 익힐 겸 여기저기를 운전해 다녔다. 한국에서는 월마트가 이미 영업을 중단한지 꽤 되었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월마트가 단연 잘 나가는 대형 마트였다. 우리가 머물렀던 도시에도 월마트가 여러 분점이 있었다. 우리는 식료품을 사러 맨 먼저 구글 맵을 쳐서 가장 근처라 싶은 월마트로 갔다. 계산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년퇴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나이든 백인 할머니, 그리고 다양한 연령의 흑인 여성들이였다. 처음에는 뭐든지 좋아 보이는 렌즈를 써서 그런지, 정년퇴임이 거의 의무인 우리나라에 비해 노년층의 노동권을 보장해주는 미국이 참 좋아보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늦은 밤까지 월마트 계산원으로 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비싼 의료비 때문이라고 한다. 보장이 많이 되지는 않지만 그나마 직장 의료보험이라도 있어야, 혹시 모를 병원비 폭탄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보낸 4년 반의 유학 생활은 내가 그 렌즈를 벗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거 같다. 거의 평생을 영어 공부한 나로서는 그 렌즈가 단단히 씌여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에는 미국에 대해 동경을 하는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초에 그런 렌즈를 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다.


❚ 셋방살이

기본 생필품을 사고 난 이후,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식료품 가게로 갔다. 마침 우리가 머물던 곳은 한국 기업이 이미 10여 년 전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라, 이미 8000여명 가량의 한국인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국 식료품과 한국식당이 꽤 많았다. 한국 식단을 고집하던 나에게는 아주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리가 간 곳은 한국으로 치면 소규모 동네 슈퍼 같은 곳이었다. 먼 이국땅에서 내 눈에 익숙한 물건이며 한국 음식들이 진열된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하고 반갑기도 했다. 이방인의 타지 생활에 대한 서글픔이 그 슈퍼를 들어서는 순간 물씬 풍겼다. 그 동네의 외곽에 자리 잡은 그 초라한 상점에는 한국 물건과 간단한 한국식 먹거리 등 이것저것 소규모로 진열되어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 같은 전체적 풍광에서 소외된 소수민족인 우리의 처지를 민낯으로 내보이는 듯해서 서글픔도 와락 몰려왔다.

우리가 주인인 우리나라에서 뚝 떨어진 느낌, 그리고 셋방살이 생활을 하는 느낌, 그런 첫 인상은 거의 5년간 머무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곳에서의 장보기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생기게 만드는 곳이었다. 한국 물건을 보면 새록새록 예전의 기억이 나곤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 주인 되시는 아저씨는 거의 7~8년 째 그곳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장사는 제법 잘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늘 한국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다. 첫 해에 나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아저씨의 심정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 슈퍼 근처에는 한인 회관이라는 곳도 있었다. 그 곳은 한국 이민자들이 모여서 작은 커뮤너티(community)를 형성하는 데 구심점역할을 하도록 의도된 곳이다. 정기적인 체육대회도 열고 음악회나 축제 같은 행사도 하는 모양 이였다. 우리가 도착하고 얼마 후 한인회가 음력 설날 행사를 개최했다. 지역에 있던 작은 컬리지(college) 강당에서 노래자랑도 하고 한국 음식도 나눠 먹었다. 다들 사람들이 즐거워 보였고, 타지에서 한국에 대한 향수병을 서로 달래기에 충분한 날이었다. 그 이후 체육대회도 어느 정도 한국인들끼리의 정을 느낄 수 있던 행사였다. 하지만 그 한인 회관도 내가 머무는 기간 끝에는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전, 현직 회장단들간의 소송 분쟁과 잇권 다툼 등의 크고 작은 불협화음으로 결국 그 구심점의 역할을 잃어 버렸다.


❚ 가까이 하기엔 안 가까워지는 관계

타국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들은 가시가 돋힌 선인장처럼 서로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정착 초반에 우리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 성당에 두 달 가량을 다닌 적이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이민 2세이거나 이민 온 지 꽤 된 아이들이라 자기들끼리 영어로 대화를 했다. 우리 아이들은 할 줄 아는 영어 문장이 몇 개 안되는 그런 상황이라 같은 생김새의 한국 아이들 속에서도 이질감을 느꼈다. 한편, 오랜 이민 생활로 그 곳에 지내는 한국 이민자들은 이미 반은 미국인 반은 한국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공감이 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일요일 성당 예배에 우리는 서로 안녕하세요만 건넬 뿐 마음을 열고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었다. 이민자들은 아무런 도움이나 보조 없이,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그 곳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주 치열하게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옆을 살필 겨를도 여유도 이유도 없이 앞을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쉴 새 없이 일 하고 또 일하는 일상을 견디는 듯 했다.


내가 그곳에 머문 지 2년 정도 될 무렵, 그 지역 사람들끼리 정보 공유 및 중고 물품 거래를 위한 카카오톡 공동 채팅방이 생겼다. 은퇴하신 한국인 교수님이 그곳 한국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를 일구려고 만드셨다. 그런데, 점차 그 채팅방도 서로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살벌한 공간으로 변질되는 상황도 있었다. 현지 한국인들은 귀국자들이 급히 처리할 물건을 싼 값으로 사냥하거나 중고 물건 거래 장터로 그 채팅방을 활용할 뿐이었다. 지금은 그곳이 더 나아졌기를 희망한다.


❚ 무늬만 한국인

나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대학교 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한국인들과의 교류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한국 성당도 두 달 정도만 다니고 이후에는 미국 현지인들이 다니는 교회에 거의 4년을 다녔다. 미국 생활을 경험하러 간 초심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한국인으로부터 상처를 덜 받기 위해 나는 박사시절에는 아예 한국인들과의 교류를 최소화했다. 물론 미국 백인 교회를 다니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미국 본토인의 습성과 정서들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늬만 한국인으로부터 느끼는 일종의 씁쓸함보다는 차라리 마음에 상처로 남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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