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의 화두: 신분과 집
❚ 당신의 신분은 뭔가요?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 지내면서 나는 나의 신분에 대해 크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신분이라는 말은 옛날 역사책에 나오는 양반 신분, 천민 신분 그런 단어에나 붙을 법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와 있는 이곳은 21세기 선진국, 미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신분이라는 단어가 내 일상대화의 아주 많은 부분에 쓰인다. 난 이 또한 뭐든지 좋아 보이는 렌즈를 착용하던 시절에는 크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흐른 후, 일상의 많은 부분이 이 신분하고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학생 비자로 온 나는 이곳에서 노동을 할 권한이 없다. 그저 돈을 지불하고 교육이라는 소비를 하는 조건으로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입국이 허용된 셈이다. 하지만, 비싼 생활비, 교육비를 감당하기에는 나의 자금 줄에 서서히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아무리 허드렛일이라 하더라도 노동 허가증이 없이는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신분이라는 말은 예전처럼 신변의 자유나 지위의 고하를 의미하는 신분이 아니라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머물 수 있고 노동할 권리를 가진 법적 상태 즉 영주권을 의미한다. 이 영주권은 고학력자나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저 쉽게 주어지진 않는다.
❚ 열정 페이로 구매하는 미국 영주권
내가 알기로는 미국은 미국 내 회사 또는 기관이 필요로 하는 특정 기술이나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영주권을 준다. 또는 미국 사람들이 꺼려하는 3D(Dirty, Dangerous, Demeaning)업종에 저임금 노동을 제공할 사람에게도 준다.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 내 닭고기 처리공장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일을하고 미국 영주권을 얻는 것도 봤다. 알고 지내던 40대 한국 여자분도 메시코인 남편을 미국으로 합법 이민을 시키기위해 미국 영주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 혼자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인 아들 둘을 키우며 그 닭공장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미국 내 우수한 대학을 졸업한 인재라 하더라도, 이 영주권을 후원해주는 회사나 기관에 고용되지 않으면 더 이상 미국 내에 머무는 게 현실 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 사회 새내기들은 미국에 있는 크고 작은 한국 회사에 영주권을 볼모로 몇 년씩이나 열정 페이를 지불하며 근무한다. 간혹, 일하던 회사가 영주권 절차 중간에 파산이 나면 그 간의 일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그래서 내가 머물던 그 세월동안 영주권에 관한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참 많이 전해 들었다.
❚ 치과 진료 중 흘린 눈물
미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 부부가 있었다. 그 남편은 90년대 중반 서울에서 대기업을 다니시다가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관광 비자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입국했다고 했다. 그 당시 신혼이였던 이 부부는 관광 비자가 만료 될 즘부터 부인이 ESL 영어 학원에 등록해서 학생 비자로 미국에 체류를 했다고 한다. 거의 15년을 정식 노동허가증이 없이 알바 수준의 일거리등을 하며 부인의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버티었다고 했다. 그 기간 동안 그 부부는 아무런 의료 혜택도 없이 아들, 딸까지 낳고 살았다고 했다. 남편과 부인 둘 다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란 게 아니어서 거의 아무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 세월의 고초를 거의 맨 몸으로 감당하면서 심리적 불안증도 생겼다고 했다. 거의 15년의 세월 동안 영주권을 스폰 해주기로 한 회사가 망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고 했다.
그 인내의 세월을 거처 15년 정도 만에 영주권을 부여 받고 그 부인은 처음으로 치과 진료를 보러 간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치과 진료실 의자에 누워 하얀 목수건을 둘러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고 했다. 내가 미국을 떠나올 때는 다행히 그 분의 남편은 꽤 괜찮은 미국 회사에 취업이 되어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인의 불면증은 여전하다고 했다.
나는 그 부부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들을 때 마다 늘 마음에 의구심이 생겼다. “왜?, 왜 그래야만 했던거지? 한국이 죽을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 세상 천국도 아닌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 고생스런 날들을 견디는 중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 그 부부의 바램은 오직 하나였다. 그 자녀들이 미국사회의 주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주류라는 말의 정의가 무엇인가?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주류가 혹여나 된들 그게 인생에서 뭘 의미하는 건가? 그 세월의 엄청난 희생을 보상해 줄 만한 대단한 것인가?
❚ 너도 나도 내 집 마련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에게 신분 해결에 관한 자신의 스토리를 말하라고 하면 아마 누구나 다 눈물겨운 사연들을 털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산을 넘고 나서는 또 다른 산을 향해 달린다. 그렇게 어렵사리 미국 영주권을 가지게 되면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은 곧바로 집을 산다. 한국은 집을 장만하려해도 목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출한도는 집값에 비하면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의 월급쟁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하늘에 별 따기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내 집 마련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대도시를 제외하고 미국 대부분 지역의 집값은 한국보다는 싼 편이다. 또, 목돈이 없어도 집값의 90 퍼센트 가량을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대출을 내고 매달 갚아나가는 게 신용점수를 올리는 지름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월급대비 다소 무리가 되는 집이라 하더라도 덜컥 큰 집을 사기도 했다. 땅 넓은 나라에 와서 잔디가 잘 가꾸어진 근사한 집에 살아야 뭔가 성공한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내가 살았던 도시에서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꽤 괜찮은 동네에 위치해 있는 제법 큰 집에 주로 살고 있었다. 미국 현지인들에게 한국인은 돈 많은 사람들이라는 인식까지 생길 정도였다.
❚ 내가 여기 왜 왔더라?
한국 이민자들 사이에서 화두는 언제나 영주권과 집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그들은 새로이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꼭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신분 해결은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어요? 신분해결이 최우선입니다. 그거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집은 하나 사셨어요?"이다. 매달 아파트 임대료가 아까우니 집은 일단 먼저 사두시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도 늘 뒤따라왔다. 한국인을 만나면 모든 대화는 결국 그 두 가지 이슈로 귀결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나브로 내가 왜 미국에 왔는지 그 본질이 혼란스럽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이민을 온 건지, 단순히 잠시 유학을 하러 온 건지 상황 파악이 점점 애매하게 변해갔다. 아이 없이 이 곳에 남편과 왔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냥 유학을 하려던 초심을 굳건히 유지했을 것 같다. 하지만, 두 아이의 부모로서 남편과 나는 늘 영주권이라는 것으로 머리와 가슴이 답답해져 갔다. 정말이지 마음의 큰 돌덩어리처럼 우리를 끌어 내렸다.
❚ 자기체면 또는 자기암시의 무서운 이면
참 아이러니 하게, 내 눈에는 한국 이민자들의 삶이 쉴 새 없는 경주마 같은데, 정작 그 자신들은 그런 빡빡한 삶이 괜찮고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같은 경주마의 대열에 얼른 들어오기를 권했다. 그리고 그 경주에서 동기가 없어질 때를 대비해서 집을 먼저 사 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집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현실이 게으름을 피울 겨를이 없이 열심히 살게 만들 거라는 논리였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체면을 걸며, 힘든 삶의 일정을 견디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나는 여기서 잘 살 거야. 한국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야. 우린 여기서 꼭 성공한 삶을 살 거야.'하며 말이다.
❚ 낯선 공간에서도 지혜롭고 싶은 방향치
한때, 우리 부부도 영주권을 따고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건가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남편이 한국 회사에 취업을 하면서 영주권에 대한 문이 열렸을 때 우리도 남들처럼 집을 장만해보려는 계획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먼 이국땅에서 경주마 같은 각자의 삶을 사는 걸 보면서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렇게 양 갈래 생각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내 마음과 머리를 혼란시키곤 했다. 혼란스러움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특히 낯선 공간에서 스스로가 나약한 존재라 여겨질 때는 더욱 그러하다. 유학 기간 동안 나와 남편은 우리 아이들 그리고 우리 가족 전체의 삶에 가장 유익하고 의미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엄청 많이 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방향을 지혜롭게 찾아 나가고자 애를 썼다. 오랜 세월의 고민 끝에 박사 과정 마지막 일 년을 남긴 시점에 우리 부부는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최종 마음을 먹었다. 영주권에 관한 마음의 짐은 아예 없애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그간에 그 마음의 짐을 왜 구지 짊어지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린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이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