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곳을 진심으로 ‘호~’ 해주는 사람들
❚ 아기자기한 미국 초등학교 투어
미국의 봄 학기는 1월 첫 주에 대부분 시작된다. 새해 첫 주 학교 문이 열리는 날, 나는 주소지가 속해 있는 공립 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학교투어 신청을 했다. 그냥 찾아가도 되지만, 난 괜히 영어로 말하는 연습도 할 겸 그 학교 사무실에 전화해서 새로이 이사를 왔고 두 아이를 그 학교에 입학 시키려고 한다. 한 번 찾아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리고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안내 받고자 한다고 했다. 미국에는 그냥 불쑥 가서 학교 투어 서비스를 받지는 못한다. 다행히, 오피스의 직원은 반기는 목소리로 내일 오후로 시간을 예약하면서 그 때 학교로 방문하면 투어를 시켜 주겠다고 했다. 난 내 영어실력이 쓸모가 있음에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는 들 뜬 마음으로 그 학교에 갔다. 미국 학교는 한국 학교와 외부 풍경부터 사뭇 달랐다. 한국의 초등학교는 동네 한 가운데 있고 넓은 운동장은 동네 주민들의 운동 공간이자 아이들의 방과 후 놀이터이다. 그러나 미국의 초등학교는 초록색 들판 한 가운데 동그마니 학교 하나가 외딴 곳에 있었다. 넓은 운동장은 없고 뒷 뜰 같은 작은 터에 미끄럼틀, 그네가 몇 개 있는 게 다였다. 그리고 학교 건물 앞은 등하교 시간, 학부모들의 차들이 들어오고 나가도록 하는 드라이 쓰루 자동차 길이 있다. 그게 학교 외부 모습이다.
건물 안은 한국 학교보다는 작고 아담하게 코너마다 아늑하게 잘 장식해 두었다.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던 중학교 우리 반 교실은 이렇다 할 테코레이션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고 그냥 휑한 공간이었다. 나의 예술적 감각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그런 걸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곳의 교실은 마치 어느 가정집의 거실을 연상케 할 만큼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카페트가 깔려있고 은은한 램프도 있고, 좋아하는 스포츠 팀의 로고가 새겨진 깃발도 있었다. 미국 초등학교의 교실은 넓은 거실 같은 그런 아늑함이 풍겼다. 대부분 교실에는 카펫이 하나 쯤은 있었는데, 그 곳에 아이들이 몰려 앉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각 담임 선생님들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꾸며져 있었다. 수학, 영어의 기본 개념이 담긴 학습 자료가 벽이나 칠판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학용품이 가지런히 정리 되어 있었다. 또 어떤 반은 너무 눈이 복잡할 만큼 지나치게 뭔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도 했다. 아무튼 개성이 넘치는 나라에 개성이 넘치는 각 반 교실이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곳은 그 학교 도서관이었다. 초등학생 키 높이에 맞는 아담한 키 높이의 책장에 숫자가 크게 적혀있었고, 책마다 작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AR(Accelerated Reader)이라는 어린이 독서 권장 프로그램에서 등급화한 순서대로 책이 정리 되어 있었다. 영어 교사였지만 나는 어린이 영어 독서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바가 없던 상태였다. 아마도 그 당시 열의가 있는 엄마들은 다 알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날 AR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접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둘째에게 이 도서관은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이 학교 도서관에는 한국 엄마가 매일 봉사하러 오신다고 했다.
❚ 무서운 주사 4대씩 순삭
그렇게 학교 투어를 끝내고 오피스 직원은 우리에게 입학을 시키기 위한 필요 서류를 안내해 줬다. 입학을 시키기 위해서는 부 또는 모의 이름이 적혀있는 전기세 청구서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내에 보건소에 들러서 법정 필수 예방 주사를 맞히고 접종 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전기회사에 찾아가서 새로 전입해 왔다고 신고를 하고 전기료 청구서에 나의 이름을 등록 시켰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20분 운전해서 보건소에 갔다. 역시나 보건소도 외딴 곳에 있었다. 초행길이고 한국에서도 고속도로 운전은 거의 안 한 나로서는 아주 살 떨리는 운전을 하고 타운 외곽에 있는 보건소에 도착했다.
보건소는 참 이상해 보였다. 한국 보건소는 참 친절하고 실내도 환하고 아늑하게 꾸며 놓는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곳은 냉랭함이 절로 풍기는 그런 회색 시멘트 건물에 아무 장식도 없었다. 예전 기차역 발매소에 가면 유리창 너머로 기차표를 발매해주는 직원이 일하듯이 그 보건소 직원도 그렇게 두꺼운 유리창 너머에서 일 하고 있었다. 미국의 공공 기관은 대체로 총기 사고를 막기 위해 방탄유리 막을 치고 그 너머로 민원 처리를 하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아이들 여권을 내밀고, 법정 필수 예방 주사를 맞으러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미리 아이들 예방 접종 내역서를 영문으로 발급 받아서 갔어야 했다. 그것까지 챙겨야 하는 것은 전혀 알지 못 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은 이미 맞았을 지도 모르는 주사까지 다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두 아이는 양 팔에 2대 씩 총 4대의 주사를 하루에 맞았다. 정말 무지막지한 나라이다. 나는 애들한테 참 미안했고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 새 학기 준비는 당연 교복
그 날 저녁 학교에서 받아 온 학교 안내 서류 뭉치를 펼쳤다. 부모가 서명해야할 서류들이 한가득 이었다. 대충 읽고 사인하고 학교로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런데 교복이 문제였다. 한국은 초등학교는 교복도 없을뿐더러 중, 고등학교 교복을 사는 것도 교복 파는 특정 브랜드 매장에 가서 사이즈만 말하면 바로 현장 구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 초등학교는 교복을 입는다. 교복은 어느 학교 할 것 없이 카키색 면바지에 폴로 티셔츠이다. 바지는 모두 동일하지만 폴로 티셔츠는 학교마다 색깔이 다 다르게 배정되어 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닐 학교는 진한 초록색 이었다.
급하게 월마트하고 타겟(TARGET)이라는 대형 슈퍼에 갔다. 대부분 가을 학기가 새로운 학년도의 시작이라 그 때 가게마다 물건이 많이 있지만, 지금 봄학기에는 수요가 많지 않아서 거의 물건을 가져다 놓지 않는 듯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맞는 사이즈를 찾기가 참 힘들었다. 그냥 저냥 맞는 걸로 대충 구매하고 집으로 왔다. 해가 저물 즘 집으로 향했다. 아직 1월이라 낮이 짧은 시기였다.
❚ 서글픔을 뿜어내는 해질 녘 풍경
낯선 공간에서의 해질 녘 풍경은 알 수 없는 서글픔을 공기 중에 뿜어낸다. 아직 나는 내 대학원 수업 준비도 전혀 하지 못한 상황이다. 내가 받게 될 수업 수강 신청에 대한 안내도 받지 못했다. 그저 입학 허가서만 들고 이 먼 곳에 왔을 뿐이다. 하나하나 확인하고 문의하고 헤쳐 나가야 할 세부 사항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난 이곳에 두 아이와 낯선 마을의 쇼핑 몰에서 내비게이션를 켜서 어둑어둑한 저녁 길을 뚫고 낯선 집을 찾아 가고 있다. 아직 내비게이션 없이는 이곳이 어딘지 동서남북 분간도 전혀 되지 않는 상태이다.
❚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
아이들 등교 첫 날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들여보내고 그 도서관에 찾아갔다. 50대 후반의 여자 사서 선생님과 한국인 학부모 도우미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 학부모는 그곳에서 2년째 자원 봉사를 도맡아 하시고 있다고 했다.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한국 엄마들에게 자원 봉사 일을 허락해주셨다. 1시간 운전해서 가야하는 교육대학원 학생 처지에 일정 빠듯했지만, 아이들 학교 적응을 위해 그 학교 도서관에 자원 봉사 일을 하기로 했다.
학교 개학 후 이내 아침에 아이 둘을 내려놓고 곧바로 도서관으로 가서 오전을 거기서 보내곤 했다. 그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외국인 학부인 우리들을 아주 따뜻이 맞이해주셨다. 학교 교사인 나 이지만, 사실 학부모가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고 신경이 많이 쓰인다는 걸 안다. 게다가 외국인 이민자들의 학부모라면 더더욱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분은 우리를 아주 고마워하시고 매년 도서관 도우미 어머니들을 위한 티타임 행사도 열어 주시고 감사 선물도 주셨다.
❚ 노련한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영업 비밀
그 학교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색깔 혹은 레벨의 책을 읽고 온라인상의 AR퀴즈를 맞춰서 통과하면 일정 점수가 쌓인다. 그 쌓인 점수를 마치 쿠폰 모으면 선물을 받듯이, 그 점수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도서관에 와서 작은 상품을 받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그 공립학교는 대부분 흑인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학업 수준과 학습 의욕이 미국 평균에 아주 하회하는 그런 학군이었다.
그 사서 선생님은 그런 여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사기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엄청 애를 쓰셨다. 기대에 찬 얼굴 표정으로 책을 열심히 읽고 성실한 귀여운 학생들은 자신이 이룬 점수를 자랑하듯이 그곳에 와서 상품을 받아갔다. 그런데, 그 흰머리의 사서 할머니 선생님은 그냥 상품을 덜렁 주는 게 아니라, 하이파이브 엉덩이 쿵 손뼉 짝 등의 일련의 동작들, 그리고 랩과 같은 짧은 노래를 아이와 함께 하고서야 선물을 줬다. 나는 우리나라 정서로 보자면 오만상 오바 액션에 눈살을 찌푸릴 것 같은데, 그 아이들은 스스로를 엄청 자랑스레 생각하는 표정이 절로 풍겼다. 매일 같이 있는 풍경 이다보니, 나중에도 난도 익숙해졌고, 우리 아들도 그런 선물을 받곤 했다. 그 덕분에 둘째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학교생활도 자신감을 얻으며 잘 하게 되었다.
유학 첫 일 년 간은 거의 매일 오전에 도서관 도우미를 했다. 정착 초기의 이런 저런 고민 상담도 해주시고 그 선생님은 우리 한국 엄마에겐 참 고마우신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2년째 도우미를 하고 있던 한국 엄마도 나중에는 아주 친한 언니 동생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 도서관 한켠의 작은 준비실에서는 바쁜 책 정리를 끝내고 잠시 도우미 엄마들은 인스턴트 믹스 커피를 나눠 마시곤 했다. 얼마 전에 이민 온 한국 엄마, 오래 있었던 한국 엄마 모두 각자 현지 생활의 고달픔을 수다로 털어내고, 다양한 생활 정보 등을 공유하며 정착 초반의 마음의 고단함을 조금씩 덜어내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1년 후 그 사서 선생님은 근처 영재 학교로 전근 가셨다. 다른 사서 선생님으로 젊은 여교사가 오셨다. 새 사서 선생님은 학부모 도우미를 원하지 않으셨고 학부모의 도서관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냉랭한 전형적인 미국 사람이었다. 우리는 예전의 그 사서 선생님의 열린 태도가 이민자의 학부모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었음을 알았다.
❚ 맨 땅에 헤딩 하면서도 서로 호~해주던 사람들
유학 시절 첫 한 학기는 시작할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압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을 반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들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다. 내가 두려움에 떨면, 나를 믿고 온 우리 두 아이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모성애의 최대치를 끌어올려 매일의 일들을 헤쳐 나가려고 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곳에도 마음 따듯한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해 하며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