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서도 서로 만날 수 없는 새로운 곳으로 점프인.
❚ 미안함 가득, 무거운 발걸음
어두운 이른 새벽, 아직 해는 뜨기엔 꽝꽝 멀었다. 12월 크리스마스이브의 새벽은 참 춥고 길었다. 공항으로 가던 날, 홀로 남겨질 친정아버지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평생처음으로 아빠를 꼭 안아드렸다. 드시는 게 많지 않아 늘 왜소한 몸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처음으로 아빠를 안고는 깜짝 놀랐다. 너무 많이 마르셨다. 그해 여름 엄마를 먼저 떠나보내시고 그 슬픔을 가누느라, 몸이 더 야위었던 거 같다. 미안함을 한 가득 안았지만 나는 그래도 발길을 옮겨야 했다.
❚ 참 다르고 다른 부녀지간
그때도, 지금도 친정아버지는 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신다. 유학을 다 하고 돌아온 지금도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은 나와 친정 아버지사이의 대화를 막는 큰 장애물이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열심히 씩씩하게 생활하는 게 나의 삶의 이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를 닮았고, 우리 아빠는 엄마와 정반대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분이셨다. 조용하고 지루하고 소소하고 소극적으로 생활하는 우리 아빠를 보면서 난 아빠 딸 이였지만, 그런 아빠가 못마땅했다. 집의 가장이 가장으로서의 리더십이 없이, 엄마의 그늘에 안온하게 사는 거 같아 사춘기 시절엔 그런 무능력한 아빠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른 적도 많았다.
❚ 깊은 수렁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도 사실은 나의 그런 천성이 일조를 한 건 분명하다. 더욱이, 유학을 가고 싶어진 시기도 친정 엄마가 심한 우울증을 앓고 계실 즘이었다. 평생 성실하게 사시고, 자식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으시고 누구보다 자식들 독립을 잘 하게 만드신 엄마였는데, 어느 날 찾아든 삶의 공허함과 무기력증, 우울증을 스스로 이겨내시지 못하셨다. 딸들이 곁에 가까이 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는 없었다. 뭐가 우리 엄마를 그런 깊은 수렁으로 빠뜨렸는지 지금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다. 나는 몇 년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고, 자꾸 자꾸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엄마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누구도 엄마를 구해 낼 밧줄이나 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 닮아서 무서웠고 그래서 다르고 싶었다.
나는 다른 형제자매 중에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다. 그래서 난 더 두려웠다. '언젠가 나도 엄마처럼 삶의 동력을 잃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그래서 난 더욱 엄마와 다르게 살고 싶었다. 엄마가 찾지 못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고, 새로운 세상에 가서 나를 실험해보고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제한된 교사생활에서는 할 수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의 세상사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긴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 스스로도 무거운 마음의 짐을 쌓아가고 있었고, 삶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 지울 수 없는 죄의식
'나 말고도 엄마 곁을 지킬 언니와 두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있으니,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지' 하고 스스로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었지만, 스스로 드는 죄의식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엄마 몰래, 엄마를 떠날 궁리를 한 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4녀 1남 중 둘째인 나는 누구 보다고 엄마의 긴 투병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우리 두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정 엄마는 직장맘인 나의 육아 부담을 대신 떠안으셨다. 나는 엄마의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딸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 들어서서 대도시로 전학 보내달라고, 떼를 쓴 건도 나였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보다 좌충우돌 삶의 큰 파도에 허우적거렸던 것도 우리 집에선 나 뿐 이였다. 요즘말로, 미친 존재감의 딸이었다. 속마음은 아주 여리지만 '하고잽이'였고, 고집불통의 딸이었다. 그런 딸이 엄마가 많이 아픈 걸 알고도 머나먼 땅으로 도망갈 궁리를 한다고 하면 누구도 나를 손가락질 할 것이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천국에서 조차 서운함을 가질 거 같다. 결국, 살아계시는 동안, 나는 차마 엄마에게 나의 은밀한 계획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 세상 어디에도 함께 할 수 없는 각자의 나라로
엄마는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해 8월에 돌아가셨고, 난 12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이제 엄마와 나는 세상 어디에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그 느낌에 난 한동안 방황을 했다. 미국 정착기에는 더욱더 뿌리 없이 훨훨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 같은 나 자신에 마음을 잡기가 힘이 들었다. 한국에 전화하면 반갑게 받아줄 마음 든든한 그런 엄마가 없는 데다 타국 생활의 쓸쓸함과 나 자신에 대한 무능력감은 날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 힘든 상황인지라,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커졌고, 아이와 남편이 다 잠든 밤, 혼자 우두커니 눈물을 흘린 적이 참 많았다.
❚ 요동치는 여러 결의 감정들
여러 결의 감정이 내 마음에서 요동쳤다. 이별을 안겨준 나의 가족, 눈에 너무도 친근한 풍경, 반복되는 일상의 평온함을 모두 남겨두는 떠나는 찰나였다. 나는 미안함, 설레임, 그리고 두려움이 범벅이 되어 어느 한 감정에도 몰입할 수 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알 수 없는 세상으로 점프인 하기 직전이었다. 나와 남편은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자꾸만 밀려드는 두려움을 말릴 길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준비를 한 시도였기에 나는 새로운 용기를 내어보려 애썼다. 마음 한켠에서는 설레임과 희망도 샘물처럼 조금씩 솟아올랐다.
❚ 얼마나 새롭길래 이렇게도 먼 것인가?
비행기는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무려 14시간가량을 자다 깨다 생각하다 먹다 졸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주도 갔을 때 잠시 탔던 비행기가 너무 빨리 착륙해버려 아쉬웠었는데, 그 무려 14시간이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에 우리 두 아이는 아주 기꺼이 미국행을 선택해주었고, 기분 좋게 엄마, 아빠의 계획에 따르기로 한 듯 보였다. 그러나 두 아이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 이후 2년 만에 잠시 한국으로 놀러 온 때에도 우리 아이들은 이제 한국은 너무 먼 곳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박혀 버렸다. 이제 완전 귀국한 지금도 우리 딸은 이제 절대 미국은 안 간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이다. 우리 네 명은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현실 영어에 꽁꽁 얼다.
열 시간 가량의 긴 비행 끝에 우리는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했다. 한 겨울이라 기상 악화로 우리가 탄 비행기는 다소 연착을 해서 다음 환승할 비행기 시간에 빠듯하게 해당 터미널에 도착했다. 짐을 들고 끌고, 우리 네 명은 정신없이 뛰고 뛰었으나 갈아타기로 한 우리 목적지행 비행기는 이미 승객 탑승을 완료한 시점이었다. 우리는 헐레벌떡 숨을 고르며 연신 미소를 띄며 티켓팅하는 사람에게 우리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여자 직원은 오히려 화를 내며, 우리 상황에 대해 일 푼의 이해심을 가지지 않고 아주 사무적으로 대했다. 이번 비행기는 이미 체크인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다음 비행기에 남은 좌석에 우리를 배정할 것이라 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사태 파악이 됐다.
❚ 화내는 영어?
그 날 그때까지 난 영어로 누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언짢은 표정을 짓는 것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늘 교육현장에서만 영어를 사용했다. 늘 다니던 영어회화 수업도, 영어 교사가 된 이후 받은 많은 연수 프로그램에서도 늘 원어민들은 나에게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돈을 받고 제공해주는 사람이었으니, 나에게는 늘 원어민은 친절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참 웃기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때부터 난 알아차렸다. 실제의 원어민은 우리와 마찬가지의 인간이고 불공정하거나, 불친절한 일을 우리에게 해버리는 그런 사람임을. 그 날 항공사 직원과 나눈 짧은 대화는 나에게 험난한 미국 생활을 예보해주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 나는 미국 현지인으로서 많은 불친절한 원어민을 맞닥들여야 했다. 책에서 배운 영어 말고 진짜 영어를 하는 그 원어민들과 말을 섞어야 하고, 이해 힘든 진짜 미국 문화 한 가운데에서 헤쳐 나가야 했다.
❚ 새로운 넓은 나라로 점프인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음 비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미국의 한 대도시에 도착했다. 다행히 도착한 곳의 날씨는 눈이 흩날리던 디트로이트와는 달리, 아주 따뜻했다. 땅 넓은 나라에 왔다는 게 절로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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