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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마지막 밤

방안 가득 채워진 묵직한 슬픔과 미안함

by Hey Soon

❚좌충우돌 미국 이사 준비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떠나기 한 달 전, 우리는 살던 전세 집과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삿짐을 먼저 보냈다. 배로 가는 이삿짐이기에 한 달 전에 보내야 우리가 미국에 도착할 즘, 우리 짐을 받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보내는 이민용 이사기에 뭐를 얼마나 보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 당시만 해도 유튜브 채널에 미국 이민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크게 많지 않았다. 내가 의뢰해볼 만한 사람은 현지에 십여 년 간 살고 있는 친척 한 명 뿐 이였는데, 우리를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이라,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보성이 없었다. 그저 미국은 넓은 땅인 나라니 배송료가 많이 들 거라는 거. 그리고 내가 갈 곳이 아주 시골이라는 거. 도착하고 거의 두 주 만에 새 학기가 시작되니 나의 살림 정리 기간이 빠듯할 거 정도만 가지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혼자 판단을 해서, 아이들 새 책상과 침대를 한국에서 사서 미국행 이삿짐에 싣기로 했다. 최악의 판단 실수였다. 나중에 현지에 가서 보니 온 동네 널린 게 쇼핑몰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되돌릴 수 도 없고, 나는 아이들 책상과 침대를 볼 때마다 참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참고로 그 가구들은 미국 생활을 다 하고 귀국할 때도 또 가져왔다.

❚정든 물건은 나의 일기장

정든 물건을 쉽게 버리는 성격이 못 되어서 아마도 그 책상과 침대는 우리 아이들이 시집, 장가가도 가지고 있을 거 같다. 김치 냉장고며 기본 부엌에서 쓰던 식기들도 그 당시 가져갔다. 김치 냉장고는 올 때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주고 왔지만 웬만한 것들은 다시 다 가져왔다. 나는 친정 엄마가 늘 나물을 무치시던 오래된 스텐 그릇도 미국에 가져갔다가 다시 가져왔다. 물건을 볼 때 마다 나의 일기장을 읽는 것처럼 내 머리 속에 많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나는 그런 물건들을 쉽게 버리기가 싫다. 아니 나의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버릴 수가 없다. 미국에서 만난 레인 할머니네 오래된 창고에서 얻은 접시 세트도 일기장처럼 귀국해 온 지금도 나의 부엌에 놓여있다. 준 할머니가 이별 선물로 사과 파이를 구워주실 때도, 그 할머니께 맛있게 먹고, 할머니 대신 접시도 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통보하고 가져왔다. 참 잘한 일 같다. 가끔 그런 물건 마저 지금 내 곁에 없었으면, 내가 미국에 갔다 온 게 그냥 꿈을 꾼 거라 생각 될 뻔 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 더하기 둘째 딸을 보내는 슬픔

그렇게 많은 물건들을 바다 건너 반대편으로 향하게 하고 우리 네 식구는 아무런 세간살이 없이 한 달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들 학교도 한 달 후에나 방학을 하고, 내가 근무하던 학교도 비슷한 무렵 학기가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나는 친정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게 죄송스러웠지만, 떠나기 한 달 동안이라도 같이 살면서, 식사도 챙겨드리고 같이 시간을 좀 더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해 여름, 친정 엄마가 세상을 먼저 떠나시고 아버지는 홀로 생활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한 달이지만 같이 생활하면서, 아버지를 좀 챙겨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친정 아버지는 둘째 딸인 나와 매일 이별을 한 셈이었다. 저녁 마다 술을 기울이시면서 속으로 아버지는 이별을 준비하고 계셨을 거 같다. 당신 아내를 잃은 슬픔 위에 딸을 보내는 슬픔까지 두 배의 슬픔으로 나는 아버지가 그 한 달을 그렇게 보내게 만들어 버렸다.


❚덜컥 마지막 밤

우리 집 두 아이는 매일을 카운트 다운하며 오래 비행기 탈 수 있게 됐다고 설렘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예전에, 제주도까지 타봤던 짧은 비행기 여행이 못 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나와 남편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으로 출국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 날 며칠 짐 정리를 했지만, 떠나기 전날 밤 늦은 시간 까지도 우리는 비행기로 가져갈 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여동생과 딸도 늦은 시간까지 우리를 챙겨주었다. 우리 아들과 내 여동생의 딸은 동갑내기이다. 생년월일도 비슷한 데 에다가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산 덕분으로 태어나서 그날 그때까지 늘 같이 다녔다. 그 당시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이고, 딸은 4학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여동생과 중학교 영어 교사인 나는 직장 맘이라 친정 엄마가 거의 매일 세 명의 아이들을 방과 후에 돌봐주곤 했었다. 그 세 명은 마치 친 형제 자매인 듯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만날 수도 없는 머나 먼 곳으로 우리를 떠나 보내야 하는 밤이었다. 막연하게 언젠가 마지막일 때가 있겠거니 생각만 했는데, 덜컥 마지막 밤이 다가왔다.


❚방안 가득 채워진 묵직한 슬픔과 미안함

웬만한 남자보다 더 과묵한 내 여동생은 늘 그렇듯이 그 날도 별 다른 말없이 묵묵히 우리 짐 싸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재잘거리는 편이 아니라 그날도 우리 는 차분히 마지막 짐을 챙기고 또, 챙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방안 가득 채워있는 묵직한 슬픔과 미안함을 가슴 가득 느끼고 있었다. 서로 애써 외면하며 그렇게 시간을 흘러 보냈다. 거의 밤 자정이 될 무렵 우리는 겨우 짐을 다 챙기고 마지막 밤, 선잠이라도 자려고 잠자리에 누웠다.


저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담아보았습니다.

https://youtu.be/DzhL7arfe8w?si=cdiBgO2RuFty6F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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