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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Sep 08. 2020

우연히, 당신의 순간

1.

카메라를 들고 터벅터벅 걷는 날이 많습니다. 특히 낯선 도시를 홀로 걸을 때 그렇습니다. 모든 순간이 새롭게 느껴지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겐 일상일 것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 이 거리를 걷고, 비슷한 식당에서 밥을 먹겠지요. 그때마다 당신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나처럼 카메라를 든 관광객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시끌벅적한 단체 관광객이 그 거릴 지났을 것이고, 오늘은 어리숙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든 동양인이 지나간 것을 보진 않았을까요. 당신에겐 이마저도 시시한 도시의 일상일지도 모릅니다.


2.

똑같은 거리를 다르게 걷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에 완전히 녹아 들어 타인을 관찰하는 것도 지겨워지는 순간 말입니다. 나 역시도 뜨거운 바닥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어느 도시에 깊이 녹아든 채로 살았습니다. 당신이 보는 것은 그 바닥에서 긁어 모은 나의 작은 형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3.

눈 감아도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있겠지요. 보통은 그 거리에서 무엇을 했는지보다 어디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가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중앙역으로 최단 거리를 가 본 적이 있지', '으슥한 골목이지만 낮에는 괜찮은 곳이야' 같은 실용적인 코멘트와 함께 말입니다. 살다보면 거리에 선호도도 생기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집 근처 공원을 돌다가 늘 같은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봅니다. 그곳은 지나는 사람도 적고, 앉는 사람은 더더욱 적은 자리입니다. 오후 2시에 그곳은 양지와 그늘이 적절히 섞여 기분 좋은 온도를 느낄수도 있지요.


4.

눈에도 선한 그리고 뻔한 그 공원과 벤치가 나에게 특별해졌습니다. 그곳을 함께 머물던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 자리를 실용성 가득한 이유 대신 한 사람과의 추억으로 좋아합니다. 어떤 공간을, 도시를 익숙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연히 마주한 그 골목에서 당신은 나보다 일찍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5.

그곳은 벤치였습니다. 나는 밤이 되자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 도시에 홀려 걷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조명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사진을 찍다가 지쳤고, 여기 저기서 꺼내든 카메라의 화각을 피해 도망친 참이었습니다. 나란히 놓여진 벤치였지만 딱 하나만 어둠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빛에 홀려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에겐 차마 그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벤치 바로 옆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털썩 앉아있었겠지요.


6.

우연히 고개를 돌린 곳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그 옆엔 당신의 도시를 새롭게 해줄 사람이 있었습니다. 빛이 닿지 않았기에 그 공간의 당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와 작은 카메라는 우연히 당신들의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7.

보통의 여행이라면 나는 그 벤치를 '야경 보다가 지치면 쉬기 좋은 공간'으로 정의했겠지요. 그러나 그곳은 '당신들의 순간을 마주한 공간'이 되었어요. 이 년 전쯤 다시 그 도시를 방문할 일이 있었어요. 엇비슷한 시간에 나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그 벤치를 찾았어요. 당신들의 순간을 마주한 곳이에요. 여전히 화려한 빛은 닿지 않고, 여전히 그곳엔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순간을 탄생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여전히 그 도시에서 낯선 순간을 만들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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