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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Oct 18. 2020

거울과 상상, 경계에 서다

1.

거울은 언제나 눈길을 끕니다. 바삐 걸어가던 도시 사람도 한 번쯤 멈춰 서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머리 상태는 어떤 지, 오늘 입은 옷이 정말 맘에 들어 감상을 하기도 합니다. 거울 앞에 서면 그 무엇보다 나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생각해보면 아주 긴 시간 거울 앞에 머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길어야 몇십 초, 1분부터는 제법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지고, 거울을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집니다.


2.

2009년 봄과 여름 사이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안방 화장대라 정확히는 무릎을 꿇고 바라봤네요.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망가진 얼굴, 굳은 표정 그리고 여지없이 자란 긴 머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별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는 모습입니다. 당신은 이런 모습을 보고도 뒤를 돌았던 것이겠지요. 긴 머리카락의 무게였을까요. 아니면 견딜 수 없던 마음의 무게였을까요. 그 무엇이 되었든 나를 거울 바깥으로 가라앉아가고 있었습니다. 굳게 다문 입술, 비틀어진 코, 엉성한 눈매, 의뭉스러운 표정. 그 모든 것들이 일시적으로 거울에서 사라지는 순간. 나는 카메라와 가위를 들고 왔습니다. 필름을 한 컷 씩 넘기면서, 거울을 바라보며, 무거운 머리를 자르면서.


3.

거울은 그저 비추기만 할 뿐인데, 나는 내면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거울이 아니면 스스로를 볼 수 없는 시각의 한계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평소 우리는 우리를 상상할 뿐입니다. 1시간 전에 봤던 거울의 모습에서, 5분 전 봤던 쇼윈도에 비친 모습에서 말이죠. 그러다 비치는 모습을 응시하면 상상과 짧은 응시의 균형이 깨지면서 무너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

사진은 균형을 깨는 매체입니다. 언제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울과는 다르게 오래도록 남아 있으니까요. 찍히는 순간에 렌즈를 응시한다는 것은 꽤나 낯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응시한 사진을 다시 바라보는 것도 아주 낯선 경험일 것입니다. 경계를 무너뜨릴 준비가 된 사람, 이미 그 경계를 넘어본 사람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우린 상상 속의 자신에 파묻혀 있습니다. 타인이 나를 상상의 나로 봐주길 바라면서 말이죠. 상상 속의 인격들이 서로를 만나 이루는 관계는 사진에서 비로소 현실로 드러납니다. 거울처럼 사진은 당신을 그저 보여줄 뿐이니까요.


5.

맞아요. 사진 속의 우리는 자주 우스꽝스럽고, 자주 못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 순간 찍힌 잘못된 이미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간과했던 진짜 모습이지요. 나는 거울을 바라보고 찍는 사진을 좋아합니다. 내가 볼 수 없던 나를 볼 수 있고, 굳이 긴 시간을 응시할 수도 있죠. 미련하게 온통 비추는 거울로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들과의 관계는 상상 밖에서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셀피 전용 어플을 사용하지 않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좋습니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6.

거울은 내면을 비추지 않습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상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죠. 내면은 오히려 이 선택에서 드러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적절한 상상에 손가락질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경계를 허문 이들도 카메라 앞에서 조금은 나아 보이고 싶은 욕심, 거울 앞에서 내가 한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그저 가끔은 거울 속의, 보정되지 않은 사진 속의 스스로를 가만히 응시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보면 우리의 관계도 조금은 현실적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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