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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인 Jan 01. 2023

시작에 법석을 떨고 싶지 않다

새해를 이어가기 위해

시작에 법석을 떨고 싶지 않다.


2023년 1월 1일. 새해. 새로운 해.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젠 예전처럼

법석을 떨진 않는다.


법석이라는 건 별 건 아니다. 그저 조금 마음이 들뜨고, 왠지 모를, 매년 찾아오는 설렘을 처음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지키지도 못할 나와의 약속을 잔뜩 늘어놓는 것. '새로움'에 취해 그만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을 남발해 버리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새해의 법석이다.


처음부터 이 모든 설렘과 새로움을 향한 열정을 요란스러운 것으로 치부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해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눈을 꼭 감고 두 손 모아 소원을 빌던 꼬마였다. 텔레비전에서 연말시상식을 진행하다 잠시 멈추고 카운트다운을 하면, 내 시간도 설렘 따라 멈추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가족과 텔레비전 속 사람들과 새해를 거하게 맞이하고 나면, 내 방으로 돌아와 얌전히 일기를 썼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아이다운 소원과 포부가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올해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할 거야! 같은.


성인이 되어 스스로 밥벌이를 하게 된 이후부터는, 연말이 되면 해외로 나돌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크리스마스 연휴가 낀 연말의 반짝반짝함을 보고 싶다는 것, 근본적인 이유는 결혼 압박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기 위한 것이었다. 잔소리한다고 결혼할 거면 이 세상에 결혼을 안 하거나 못 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걱정으로 얇게 포장된 사회의 강요는 성인을 아이처럼 무력하게 만든다. 나는 그 무력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도 잠시 잊고 싶었다. 그래서 연말이면 해외에서 반짝거리는 걸 보곤 했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2017년 새해를 맞으며 봤던 불꽃놀이, 방콕 도심 한가운데에서 봤던 2019년 새해를 위한 불꽃놀이. 모두 내가 선택한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시작이었다.


그런데 들뜨게 한 해를 시작하면 꼭 힘이 빠졌다.무언가에 관한 기대로 한껏 부푼 마음은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어 바닥에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마음이 안타까웠다. 매해 마음이라는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어도 한 해의 마무리가 되면 새해 첫날처럼 둥근 모양으로 빵빵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긍정적으로 한 해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노라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실망과 슬픔, 좌절로 점철된 한 해를 마음속에서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일 년 동안 느꼈던 자그마한 행복을 되살려 내고자 하는 의지적인 마음도 있었지만.


새해가 되기 전, 연말로 향해가는 겨울을 좋아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연말의 반짝임을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겨울은 내게 로맨틱했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에 첫 연애를 시작한 게 한 해를 보내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전 남자친구와 난 크리스마스이브에 강남역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단번에 나는 앞자리에 앉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나보다 내 소개팅을 더 흥미진진해하던 친구와의 약속에 따라 화장실을 간다며 나와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00아, O야 O!" 상대가 마음에 들면 O,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기호를 보내기로 한 약속을 재빨리 지켰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황홀하고도 요란스러운 깜빡임이 켜졌다.


사귀고 난 후에, 첫눈에 오빠가 마음에 들었다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남자친구는 이야기했다. 나도 그랬노라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친구는 친구에게 내가 마음에 든다며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하다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만난 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나는 생애 첫 연애를 시작했다. 가장 행복했던 크리스마스이브, 연말, 이보다 더 들뜨고 반짝였던 그다음 새해. 내가 기억하는 그 어떤 반짝이는 겨울보다 수줍지만 더 빛나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행복은 정확히 일 년 만에 막을 내렸다. 창대한 시작에 과정이 미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둘 다 첫 연애였기에 연애를 몰랐다. 사랑을 몰랐다. 나는 이기적이었고, 그는 이타적이었다. 나는 표현이 서툴렀고, 그는 해결이 서툴렀다. 불꽃같은 시작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사실 내 마음속 애정은 잔잔한 불빛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하게 타올랐지만 그 사람의 빛과 온도는 달랐다. 요란한 시작은 점차 비루해지는 과정을 거쳐 끝이 났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바보처럼 첫 연애의 패턴을 반복했다. 소란스럽고 법석 떠는 시작, 점차 바람이 빠져가는 지루한 만남, 그리고 결국 고꾸라져버리는 끝.

그래서 이젠 소란을 떨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연애의 시작, 새로운 일의 시작, 그리고 새해의 시작, 그 어떤 시작도 이젠 법석을 떨고 싶지 않다. 그저 어제에 이어 오늘이 이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살고 싶다. 조금 더 나아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이어짐 속에서 성장하고 싶다. 나는 성숙한 걸까, 아니면 그저 기대하는 법을 어버린 다 큰 어린이인 걸까.


2023년 1월 1일. 새해. 새로운 해.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젠 예전처럼

법석을 떨진 않는다.


지난해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올리고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을 정갈하게 적었지만, 관행처럼 고심해서 새해 첫 곡도 골라 들었지만, 마음만큼은 차분하다. 그 차분한 마음만큼 새하얀 침대 위에 반쯤 누워서 이것저것 책을 읽다가 글을 쓴다. 방안 곳곳에 가지런히 숨겨둔 주전부리를 보물찾기 하듯 찾아서 먹는다. 어제와 비슷한 날, 이어지는 하루하루.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한 해의 시작이지만 어쩐지 포근하다. 요란 떨지 않는 마음으로 지금을 이어가길, 그 속에서 조금 더 나아가길, 그렇게 끝까지 이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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