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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Apr 26. 2021

04. 코노에 묻어 둔 노래들

우리는 노래한다

                        




              

 일이 조금 일찍 마친 날 지하철을 타고 집 앞 역에 내리면 열한 시가 된다. 그러면 나는 마음이 두근두근 한다. 집으로 향해 가는 길에 위치한 코인 노래방 덕분이다. 


 거침없이 2층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 때는 항상 약간의 민망함과 흥분이 감돈다.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면 심드렁하게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사장님이 얼굴도 안 보고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해 준다. 방이 열 개가 될까 말까 한 작은 코인 노래방은 만실일 때도 있긴 하나 대개 빈 방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은 창이 길가로 붙어서 노래를 하면 새까만 밤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반 평 가량 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갑을 열어 현금을 확인하고 천 원을 몇 장 꺼내 놓을지 잠시 고민한다. 목 컨디션이 좋으면 세 장, 별로면 두 장을 꺼내 기계에 넣는다. 지이잉 지이잉 노래방 기계는 지폐를 먹으면 곧 번쩍번쩍 미러볼이 돌아가며 작동이 시작된다. 작은 방에 쿵쿵거리며 음악이 들리면 내 가슴도 기분 좋게 쿵쿵댄다.


 첫 곡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여자 아이돌의 노래를 불러 줘야 한다. 신곡이면 더할 나위 없다. 블랙핑크나 레드벨벳 노래를 주로 부른다. 청하의 ‘롤러코스터’, 선미의 ‘사이렌’도 열창하곤 했다. 트와이스의 ‘우아하게’도 부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었다. 여자 아이돌 노래는 다른 사람과 함께 노래방을 갔을 때도 가끔 부르는데, 그때와 코노에서 부를 때는 나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다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약간 코믹한 느낌으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부른다면 나 혼자 있을 때면 오늘 코노를 만끽할만한 가장 적절한 목소리를 찾고 내면의 리듬을 끌어내는 엄정한 의식이 된다. 이 의식은 실패하지 않아서 한 곡 불러주고 나면 반드시 미친 흥이 절로 난다. 레드벨벳의 ‘사이코’를 혼자 흥얼거린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 코노 데뷔를 못 했다.


 목이 좀 풀리면 이제 시작이다. 내가 코노를 찾게 될 때는 대개 새로운 노래를 접하고 흥얼흥얼 거릴 때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나 새롭게 알게 된 곡이 있으면 자연히 혼자서 중얼중얼 부르게 되는데, 그러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코노 게이지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100%까지 차기 전에 빨리 이 압력을 해소해주는 게 좋다. 안 그러면 인생이 재미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코노에서 부르는 것도 혼자 부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상하게 집이나 길거리에서 불렀던 노래는 그냥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느낌이고 코노에서 마이크를 쥐고 불러야 내 노래가 온전히 성불하는 기분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나는 코노에 가면 그때그때 꽂힌, 새롭게 연습하기 시작한 노래를 반드시 부른다. 그런데 그런 노래들은 코노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백예린, 장기하, 9와 숫자들, 아이유, 이하이, 새소년, 악동뮤지션, 카더가든…. 그래서 이때 소환되는 곡들은 장르도 가수도 다 다르다. 많은 경우 음정도 엉망이고 박자도 엉망이지만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이 노래가 내가 아는 노래가 된다.


 이쯤 되면 물리적으로도 목이 다 풀리고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흥이 오른다. 뇌에서는 아드레날린이 푹푹 쏟아진다. 거칠 것이 없다. 발라드의 차례가 온 것이다. 발라드는 내적 흥이 있을 때 불러야 즐겁지 처져 있을 때 부르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 고음을 내지를 수 있는 곡들이 리스트에 오른다. 김연우, 임창정, 김범수 등이 활약할 때다. 그 후로는 이소라가 반드시 땡긴다. ‘처음 느낌 그대로’, ‘믿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이 세 곡 중 하나라도 부르지 않으면 코 속 새끼손가락이 닿지 않는 어떤 곳이 간질간질해진다.


 그다음으로는 외국곡도 한 곡 땡겨야 한다. 팝송은 알앤비가 제멋이다. 영원한 고전 휘트니 휘스턴도, 뉴 클래식 아델도, 그루브의 왕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좋다. 마이클 잭슨도 나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코노에 앉아 있으면 반드시 한 번은 듣게 되는 시아의 ‘샹들리에’도, 돌림노래처럼 나도 부른다. 가끔씩은 일본 노래도 끌린다. 우타다 히카루, 비즈, 그레이 등 추억이 방울방울 흘러넘치는 이름들이 끌려 나온다.


 예쁜 목소리 내기가 하고 싶어 지면 인디 여가수들의 노래를 부른다. 가을방학, 우효, 치즈는 언제 불러도 실패가 없다. 델리스파이스는 인디 여가수가 아닌데도 이상하게 이 쪽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항상 엔진을 켜 둘게’는 노래 못 부르는 남자 보컬과 모던록이 합체되면 무조건 사랑에 빠지고 마는 내 취향의 개척자임에 틀림없다. 언니네 이발관의 ‘아름다운 것’도 오랫동안 나의 애창곡 리스트에 들어있었다.


 이쯤 부르고 나면 반드시 이천 원을 더 넣게 된다. 이제는 넋을 놓고 생각나는 노래는 다 부른다. 태양이나 지드래곤 곡 메들리를 부르기도 하고, 그날그날 꽂힌 가수들의 노래를 쭉 예약해놓고 불러 제낀다. 목이 좀 칼칼하다고 느껴져도 나 몰라라 땡기는 대로 부른다.


 그러고 있으면 화면 한 구석에 안내 문구가 뜬다. ‘오늘의 영업 종료 시간은 12시입니다.’ 시간을 확인하면 어김없이 11시 50분이다. 아이고, 간단히 세 곡 정도만 부르려고 했는데 오늘도 이렇게 되는구나…. 탄식은 짧고 번호 예약하는 손은 바쁘다.


 이때부터는 청승 떠는 노래들이 선곡된다. 혁오의 ‘공드리’는 언제 불러도 힘이 안 든다. 생존 수영을 하듯 최소한의 힘을 들여 부르는 노래다. 어떨 때는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쉽지만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나갈 때는 대개 노래방에 남은 손님은 나뿐이다. 한 시간 가량 혼자서 흥이 차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던 게 조금 부끄러워진다. 시선은 바닥으로 하고,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는 사장님과 작별 인사를 주고받는다.


자정이 넘은 시간, 거리는 가로등만 켜 있고 4차선 도로에는 간간히 승용차들이 지나간다. 나는 어깨에 멘 가방을 한 번 추키고, 손에 끈적하게 밴 쇠 냄새를 맡으며 노곤하지만 행복해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코로나 시국 이후로 코인 노래방에 가지를 못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정신이 피로해진 날이면 작은 부스에서 나만을 위해 부르던 내 노래가 그리워진다.


 아, 언제 다시 이 소소한 놀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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