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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May 14. 2021

06. 취향의 첫 순간

<아주 오래된 연인들>, 015B, 1992



                                        

 우리 가족들의 음악 취향은 조금씩 달랐다.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정석적으로 클래식 음악으로 태교를 하셨다. 엄마 말씀으로는 걸핏하면 울어댔던 갓난아기였던 나는 베토벤의 월광을 틀어 두면 가만히 잘 들었다고 한다. 그때 구매하셨다는 20명의 클래식 음악가 LP 전집은 얼마 전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구매한 지 30년 된, 애초에 고장 난 턴테이블을 갖다 버리면서 같이 처분했는데 아직 가끔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대중음악 취향이셨다. 정태춘, 송창식 같은 포크 가수들을 좋아하셨다. 그리고 팝송도 좋아하셔서 올드팝 테이프들이 항상 카세트 플레이어 안에 들어 있었다. 덕분에 꼬맹이 때부터 F. R Davids의 ‘Words Don’t come easy’ 같은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아버지는 워낙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셨다. 아마 총각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머리를 기르고 통기타를 들고 다녔던 멋쟁이 남학생이었을 것 같다. 엄마는 당신이 음치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지만 피아노로 가곡 반주를 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내가 아기일 때도 엄마는 홀로 테이프에 맞추어 가곡을 부르시곤 했다고 한다.


 그런 엄마와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난 내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동요들을 잔뜩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는 엄마가 사 두었던 동요 테이프들이 가득 있어서 19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동요들은 한 번쯤은 내가 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또 엄마의 친구 한 분이 계몽사 외판원이셔서 우리 집에는 계몽사 전집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계몽사 디즈니 영어 학습 그림책이 있었다. 거기에는 영어 동요 테이프 세트도 있었기에 영어 동요도 실컷 부를 수 있었다. 


 1991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나는 카세트테이프를 익숙하게 가지고 놀았다. 집에 있으면 전축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갈아 끼워 가며 노래를 불렀다. 클래식, 포크, 팝, 가곡, 동요……. 아기였던 동생이 테이프 필름을 잡아당겨서 망가뜨려 놓으면 울분에 차서 동생을 응징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우리 집에는 ‘마이카’가 생겼다. 흰색 대우 르망이었다. 아버지는 그 차에 우리 가족을 태우고 전국을 다니셨다. 이상하게 늘 차 안에서 싸움이 벌어졌던 느낌이지만……. 아무튼 자동차 안에서 듣는 음악이 즐겁다는 걸 그때부터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나 스스로 음악 테이프를 사 들이기 시작했다.


 오늘 선정한 015B의 ‘The Third Wave’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산 음반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1992년에 발매된 음반이라고 해서 좀 놀랐다. 아니,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음반을 산다고…? 당시 음반시장은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지 않았기에 빅히트셀러는 몇 년 뒤 까지 계속 팔리곤 했다. 그러니 아마 9살 때 사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아마 10살 즈음 구매했지 싶은데, 왜 그 앨범을 샀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은 울산 옥교동 거리를 엄마 손을 잡고 다니면서 ‘길보드’ 리어카에서 이 노래를 주구장창 들으며 느꼈던 가볍고 들뜬 기분이다.


 그때는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웬만한 음반들은 다 불법 복제 테이프로 나오곤 했다. 내가 구매한 앨범도 동네 편의점 선반에 꽂혀 있던 불법 복제판이었다. 1,500원 정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제법 케이스 안에 앨범 재킷도 조악하게나마 인쇄되어 들어가 있고 가사집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거실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전축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 테이프를 재생해 놓고 가사집을 보며 몇 번이고 노래를 따라 불렀을 것이다.


 노래의 경우 나는 첫 네 마디만 들으면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아마 그 취향이 만들어진 첫 순간이 이 노래를 즐거이 들었던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심장과 함께 몸을 둥둥거리게 만드는 기타 주선율이 처음으로 깔리고 그 위로 신시사이저, 베이스, 하이햇 등이 점차로 쌓이는 전주를 정말로 좋아했다. 1분이 넘는 전주가 끝나고 울림이 좋은 김태우의 보컬이 쿨하게 자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파티 타임이다. 사비에서 “처음에 만난 그 느낌~”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음빠빠~”하고 코러스를 깔면서 도취되었다. 게다가 꼬맹이 주제에 연인들의 권태를 드러낸 가사가 참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뭘 안다고…?)


 이 앨범에는 다른 좋은 노래들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 ‘수필과 자동차’도 좋아하며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좋아하는 가수의 다음 앨범을 기다리고 그 앨범을 통으로 돌려 듣는 버릇이 시작되기도 한 음반이다. 원래 통 앨범이라는 것이 10곡이 들어있으면 열 곡을 다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꼭  세 곡 정도는 그냥 그렇고, 한 곡은 전주도 듣기 싫은 곡이 나오는데, 이 때는 아날로그 조작을 해야 하는 시대였기에 싫어하는 노래를 건너뛰기 위해 3분을 어림잡아 빨리감기를 하곤 했다. 색소폰이 싫었던 건 어릴 때도 마찬가지라서 B사이드 첫 곡인 ‘Santa Fe’는 무조건 뛰어넘었던 것 같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전축의 버튼을 딸깍거리며 드러누워 있었을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노래들이다.


 당신이 “이번 주제는 왜 출판이 힘들어?”라고 물었을 때, 나는 ‘너무 소소한 개인의 이야기라서’라고 대답했었고 당신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난 속으로 그건… 큰 문제야… 하고 생각했었다. 이번 글을 보면 아마도 당신도 내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느낄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당신의 성실함을 본받아 17번까지는 어떤 노래를 글감을 잡아 어떤 주제를 가진 글을 쓸지를 정해 두었는데, 그 리스트들을 죽 살펴보니 아무래도 오늘과 같이 정보 값이 0에 수렴하는 콘셉트는 한동안 지속될 예정이다. 이번 1년간 퍼부어질 나의 추억팔이(?)를 감내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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