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영아기를 보낸 곳은 울산 신정동의 단독 주택 2층이었다. 거기서 3살 때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당연히 내 기억 속에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내가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올리는 곳은 뒷 베란다에서는 대숲이 울창한 태화강 지류가 보이고 앞 베란다에는 화단에다 내가 심었던 감나무 잎이 보이는 울산 무거동 산호아파트 101동 203호다. 나는 거기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고, 5학년 때 같은 아파트의 조금 더 큰 평수로 이사를 가 고등학생 때 부산으로 이사를 오기 전 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나의 유년기는 모두 산호아파트라고 하는 5층짜리 아파트 단지에 담겨 있었다.
이 산호아파트라는 곳에 우리 가족이 들어와 살게 된 건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회사에서 사택으로 지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계약을 한 동은 우리 앞 동인 102동이었지만 사택 경쟁에서 밀렸는지 어쨌는지 우리 가족은 그 뒷동에 터를 잡는다. 어쨌든 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독박 육아를 하게 된 새댁들이 ‘남편네 회사 사원 가족’이라는 공통점으로 모여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보다 열 살쯤 어렸을 서툰 엄마들이 쭈뼛쭈뼛 슈퍼나 반상회가 열리는 집에서 만나 장거리와 육아 고충을 나누었을 것을 상상하면, 그들의 고단함과 함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옅은 공포, 그래도 이겨내겠다는 긍정적인 열망 같은 것들이 함께 느껴진다.
나는 거기서 게으르고 소심하지만 친구도 있고 책도 곧잘 읽고 그림그리기도 좋아하는 애로 쑥쑥 자랐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는 커다란 화단이 있었고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모자람이 없이 넓은 공터가 남아 있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갔다 오고 나면 거기서 꽤나 놀았던 것 같다. 언제든 애들이 모여서 술래잡기나 얼음땡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난 달리기를 잘 못 해서 늘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날은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모든 기구들을 돌며 놀았다. 최고 인기 기구는 단연 그네였다. 미끄럼틀도 중력에 따라 주르르 내려오는 즐거움이 컸는데, 나는 친구들과 함께 경사진 판에 모래를 흩뿌려 고운 가루를 모으며 방앗간 놀이를 했던 기억이 크다.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것도 좋아했다. 놀이터에 친구가 아무도 없을 때는 뺑뺑이를 혼자 돌리고 놀았다. 힘차게 뺑뺑이를 돌린 뒤 속도가 붙으면 잽싸게 올라타서 고개를 한껏 뒤로 휘고 있으면 원심력 때문에 내 몸이며 정신이 저기 어디론가로 날아갈 것 같았고 그 정신없는 어지러움에 중독되곤 했었다.
조금 더 커서는 자전거를 아주 열심히 탔다. 아파트 단지가 작지 않았기에 단지 안에서 쌩쌩 달리기만 해도 꽤 재미있었다. 특히 우리 집이 있던 동인 101동은 바로 뒤에 강이 흐르고 담이 쌓여 있었기에 그 길을 달리는 건 매 계절 즐거웠다. 자전거를 타며 양 손을 놓기도 하고 일어서서 페달을 밟기도 하고 신났었다. 하지만 1층 공용 복도에 매어 둔 자전거는 아무리 체인으로 꽁꽁 묶어 놔도 도둑의 손을 피할 수가 없어서 자전거를 세 번인가 네 번인가 잃어버린 뒤로는 더 이상 새 자전거를 사지 않았던 기억이다. 아마 그때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지 싶다.
천지 없이 몸으로 노는 게 신났던 꼬꼬마 시절이 지나자, 나는 다른 게 재미있었다. 어릴 때의 나는 아파트 단지 밖을 나갈 일이 없었다. 친구들은 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슈퍼나 학원은 모두 단지 안 상가에 있고 심지어 초등학교도 단지 담벼락 안에 있었다. 10살이 될 때까지 아파트 안에서만 뱅뱅 돌며 살았던 것이다. 산호아파트 단지의 정문으로 나서면 아파트 앞을 가로로 길게 가리는 상가가 있었다. 2층인가 3층짜리 상가였는데, 초창기에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1층에 새마을금고가 있고 2층에 큰 교회가 있었던 건 기억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상가의 1층에 자그마한 편의점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간에 반하고 만다. 거기는 어쩐지 ‘쿨’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편의점은 아파트 단지 안의 슈퍼와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거기에는 파나 과일, 두부 같은 비정형의 물건이 없었다. 편의점에 있는 것이라고는 직육면체나 원통형 같은 공산품들 뿐이었다. 냄새도 완전히 달랐다. 슈퍼에는 온갖 유기물들이 섞인 공기가 있었지만 편의점에는 모든 것이 무생물이었다. 거기에서 물건을 파는 점원도 슈퍼의 사장 아주머니랑은 달라 보였다. 그들은 꼭 필요한 말만 했다. 그 장소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경험이라고 하면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 놀랄 일이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나 혼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니…!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들고 뜨거운 물을 받아 간의 테이블에 두고 3분을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테이블 위 선반에 꽂힌 불법 믹스테이프들에 가 있었다. 그 달의 가장 인기 있는 곡들 30곡 정도를 모아 공테이프에 녹음하여 팔았던, 누가 어떻게 만들어서 어떤 방식으로 유통시켰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 알 수 없을 상품이었다.
그 곳은 내가 처음으로 본 ‘레코드점’이었다. 앞서 말했던 015B의 앨범도 그 편의점에서 샀을 것이다. 나는 3분 동안 꼼꼼히 선반에 있는 테이프들을 다 구경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항상 그 선반 위에는 5종류쯤 되는 테이프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음반도 있었고, 어떤 것은 한 달 정도 텀을 두고 계속 새롭게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늘 신상 길보드 탑 30 믹스테이프 하나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후루룩 농심 육개장이나 팔도 도시락을 먹고는 그동안 나의 뒷통수를 힐끗힐끗 보고 있었을 편의점 직원에게 가서 1500원쯤을 주고 테이프를 사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달 신곡 믹스테이프를 사기 전까지 듣는 것이다. 그게 매달 있는 나의 중요한 루틴 중 하나였다.
더 클래식의 ‘여우야’나 김현철의 ‘왜그래’, 혹은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를 들으면 그 냄새가 난다. 이제는 기억도 바래서 죄 채도 낮은 회색이나 베이지색으로만 떠오르는 그 좁은 공간에서, 이번 달의 믹스테이프 속 곡명들을 훑으며 맡는 컵라면 냄새 말이다. 그 삭막한 공감각 속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곡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나의 취향을 만들었다. 엄마와 아버지에게서 타고난 것이 아닌, 바깥 세상에서 얻게 되는 나만의 첫 기호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