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양>, H.O.T, 1997
염소자리 B형 남자와 양자리 A형 여자. 별자리 운세나 혈액형 성격을 주워 들은 바에 따르면 상극끼리 붙여 둔 격인데, 이 두 사람은 우리 아버지와 엄마다. 별자리와 혈액형 따위로 성격을 해석하는 게 바보같은 일이라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어찌 이리 잘 맞지 하고 마음으로 감탄할 때가 있는데 그 사례 중 하나가 우리 엄마와 아버지다. 나는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 서로를 향해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둘은 한 공간에 있을 때 늘 데면데면했고, 아버지의 행동이나 말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엄마를 늘 극도로 분노하게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반드시 큰 소리와 함께 싸움이 났다. 두 사람 다 다정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성실한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나 맞지 않는지는 늘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니 제 3자일 뿐인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겠지, 하고 무심하게 생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본디 그다지 가정적이진 않았던 아버지는 점점 퇴근시간이 늦어졌다. 그러다 내 고등학교가 부산으로 정해지며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 회사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때부터 아버지의 기러기 생활이 시작되었다. 반 년 정도는 엄마가 주중에 한 번씩 아버지 집에 가서 빨래며 집안일을 하고 오시고, 주말에는 아버지가 부산 집으로 오곤 했다. 하지만 왕래는 점점 줄어들었고 우리 식구는 두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부산 집과 아버지 회사는 차를 타면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곳이므로 만약 우리 가족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했다면 아버지는 부산으로 함께 이사를 왔을 수도 있다(서울과 천안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안봉을 보라…!). 하지만 아버지는 내심 엄마와 함께 지내며 겪는 갈등들을 피할 수 있는 별거생활을 편안해 하셨던 듯 하다.
아무튼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게 된지 20년쯤 되었다. 하루 중 세 시간을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살았다고 치고 대충 계산해 보니 이제까지 내가 아버지와 한 공간에 있었던 시간은 2년 남짓 될 뿐이었다. 긴 것인지 짧은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조각 기억들은 대부분 좋은 것들이다. 동생이 갓난쟁이일 시절, 30대 중반에 막 접어들었을 젊은 아버지는 앞 안장에 조그마한 보조의자가 달린 자전거를 마련한다. 세 살이 좀 넘은 딸을 보조의자에 앉히고 아버지는 집 뒤 강둑 길을 신나게 달렸다. 술과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아파트 상가에 있던 족발집에 우리 가족을 자주 데리고 가 외식을 했는데 아직 족발 맛을 모르는 나를 위해서는 구운 새우를 주문해 껍질을 다 까서 먹여 주었던 기억도 난다. 술이 취하면 가족을 다 데리고 지하 노래방으로 가서 한 시간씩 놀고 집으로 돌아갔다. 노래를 좋아했던 나는 깡충깡충 뛰면서 마이크를 쥐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일요일 약속을 나가기 전에는 나를 자동차 조수석에 태우고 20L 들이 약수통 두 개를 뒷좌석에 싣고 집 근처 절에 가 약수를 떠 놓았다. 나는 두 손을 다 써 끙끙거려도 끌 수도 없는 무거운 물통을 한 손에 하나씩 번쩍 드는 아버지를 보며 우와 우와 하고 박수를 치곤 했다.
그런 기억들을 지금에서 복기해 보면 엄마가 왜 아버지를 미워했을지 이해는 간다. 갓 출산 후 아픈 몸으로 독박육아를 했던 엄마는 조금이라도 아버지가 육아를 도와주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딸 핑계를 대며 밖으로 나가 버리는 남편이 기껍지 않았을 것이다. 30대 후반에 이미 고혈압 약을 먹어야 했던 아버지가 술이며 기름진 돼지고기를 줄이지 못하는 모습도 밉고 답답했을 거다. 일주일에 하루 가족과 있을 수 있는 주말에 약속이 있다며 집을 떠나버리는 남자를 남편으로 여기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어디 하나 의지할 곳이 없는 타지에 와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 남자와 감정적 교류를 할 수 없었던 엄마는 금방 부서졌다.
물론 아버지는 애를 쓰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은 엄마에게는 가 닿지 못했다. 아버지가 애를 쓰는 정도로는 엄마의 마음을 고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했었어야 할까? 그리고 또 엄마는 어떻게 했었어야 할까? 나는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별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1996년 데뷔한 H.O.T.는 내 첫 ‘오빠’들이었기에 당시 나는 하루 종일 H.O.T.의 앨범들을 듣고 있었다. 막 틴에이져가 된 나의 첫사랑은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동생의 사정 같은 것을 고려하지 못할 만큼 맹목적이었기에, 우리 가족을 태우고 주말 드라이브를 나가는 작은 흰색 르망 안에는 엉성한 갱스터 랩이 늘 고래고래 틀어져 있었다.
H.O.T.는 1집 ‘전사의 후예’의 성공에 힘입어 2집은 더 센 힙합 곡을 타이틀로 정한다. 그것이 바로 ‘늑대와 양’이라는 곡이었다. ‘늑대와 양’은 늑대로 비견되는 기득권층이 양으로 상징되는 약자 계층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곡으로, 후렴구에 “에이 늑대, 빌어먹을 짐승같은 놈들!”이라는 강한 래핑이 인상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나는 우리 가족의 주말 드라이브 내내 비속어를 뱉어 대는 미친 중학생이었다는 뜻이다.
평소에는 맹한 주제에 H.O.T. 노래를 들을 때는 세상 분노를 다 자기가 짊어진 듯 구는 딸을 진정하고 싶으셨는지,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딸 덕분에 신세대가 되었어.”
“왜요?”
“회식 때 노래방에 가서 이 노래를 딱 예약했거든. 그러니까 우리 여직원들이 ‘어머, 대리님 이런 노래도 아세요?’하고 멋있다고 난리가 났어. 그런데 노래를 부르다 보니까 아, 도무지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중간에 껐지. 하하하.”
아버지의 말이 계속될수록 차 안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아니, 아빠. 지금 분위기를 좀 보라고. 도대체 회식 가서 술 먹고 노래 불렀다는 얘기가, 그래서 여직원들이 좋아했다는 얘기가 어울리기나 하냐고…. 그때 사이드미러에 비친 엄마의 얼굴은 차가운 분노에 골똘해 있었다. 그 뒤의 일은 어떠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분명 어떤 사소한 일로 한바탕 다툼이 벌어졌을 것이다.
만약 그때 내가 좋아했던 ‘오빠’가 신승훈 같은 소프트 발라더였다면 우리 차 안 분위기가 좀 나았을까?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