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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븟 Jan 02. 2022

그날의 풍요

모처럼 일박 이일 여행을 떠났다.


변에 식당도 이렇다 할만한 편의시설도 없는 - 긍정적인 측면에선 풍경과 편리를 맞바꾼 -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룻밤이지만 꽤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 듯 느껴졌다. 나는 만반의 태세로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넉넉한 먹을거리와 기타 등등을 챙겼다. 혹시나 모르니 프라이팬도 두 개나 짐에 욱여넣었다.








들뜬 기분으로 두어 시간쯤 달리니 어느새 목적지 부근이었다. 그때부터는 곧게 앉아서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좁다란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구불구불한 길목마다 잡초가 무성하였지만 조금 더 가다 보니 그런 풍경을 등지고 단층의 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체크인을 도와주실 분이 바깥에 나와계셔서 열쇠를 받아 들고 숙소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을 대강 정리해두고서 부엌살림을 점검하는데, 맙소사! 좁다란 수납장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식기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짐짓 그렇게 믿어버린 나의 실수였다.


비상사태를 알아차린 양 신선도를 유지하며 냉기를 머금은 아이스박스 속의 많고 많은 것들이 나를 원망하는 듯한 싸늘한 분위기를 풍겨댔고, 나는 괜히 으스스한 기분에 차키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뭐라도 사야 한다는 심정으로 십여분 즈음 차를 몰로 나가 두리번거려 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시골길을 따라 늘어선 자그마한 집과 전봇대가 전부. (대형마트에서 보았을법한) 식기류를 팔 듯한 규모의 상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나마 가장 커 보이는 동네 슈퍼에 들렀지만, 그곳에는 인근의 숙소에 묵는 손님들이 간간이 살 정도의 물품 정도밖에 없었다. 유난히 반질반질 새하얀 일회용 접시를 사들고 다시 돌아섰다. 사실 그것 말곤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검은 봉지를 들고 두세 걸음이면 얼마든 왕복이 가능한 좁은 부엌에 들어섰다.


그런데, 문득 자취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엔 대부분이 최소한이았다. 무엇이든 간에 하나 이상을 불필요하단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았다. 식기도 무척 단출하였다. 넉넉한 사이즈의 플라스틱 그릇 하나가 밥을 먹을 때면 밥그릇이었고, 국을 먹을 때면 국그릇이었고, 우유를 부어 콘플레이크를 먹을 때면 콘플레이크 그릇이었다. 포크와 젓가락 사이에도 적당한 구분이 없었다. 양식이든 한식이든 한 가지로 통일했다.  


부엌살림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런 상태라서, 만일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급히 짐을 싸 떠나야 하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나는 문제가 없었다. 금세 후다닥 모조리 다 싸들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원시적이기까지 한 살림살이였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았으며, 신기하게도 그것이 나에게 부족함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도리어 '가뿐하고 자유로운 동무'가 가까이에 있는 듯이 듬직했다.








(어른이 되었단 확신은 없지만, 한 해 한 해를 살아내며) 나는 무수한 선택을 반복하며 많은 걸 구매했다. 고로 나의 부엌살림은 전반적으로 나아졌다 - 프라이팬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이름을 지어주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경험하는 풍요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포만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이지만, 그것은 풍요의 본질을 말해주었다.


어쩐지 부족함이 없어서 도무지 부풀어 오르지 않는 풍요는 겸연쩍은 미소를 띠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스친 그런 밤이었다.









epilogue




일회용 접시에 차린 '딱새우 비스크 쉬림프 로제 파스타'와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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