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처음 책을 읽던 날
"모자가 어디로 날아갔지이?"
"항아리 뒤에 있나아?"
"아니, 라디오 뒤에 있나아~"
복숭아보다 더 희고 발그레한 네가 처음으로 책을 읽는다.
아가, 이날 너는 5살이었고,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었어.
마침 그날 수요시장이라서, 너랑 어미는 떡볶이도 사고
순대도 사고, 어묵도 사서 오는 길이었지.
그런데, 마침 그날 영업을 나온 학습지 선생님이,
‘아가 한글 읽을 줄 아나요?’ 하기에
어미가 ‘아직 못 읽어요.’ 했더니,
그 선생님은 깜짝 놀라며, 샘플 책을 몇 권 주더구나.
집에 와서, 너는 어미의 널따랗고 커다란 책상에 앉더라.
자그마해서 바닥에 발도 닿지 않는 네 다리를 대롱대롱하며 말이야.
그리곤 넌 곧, 엄청 기대에 찬 눈으로, 어미에게 빨리 그 책을 읽어달라고 했어.
어미가 한 번을 읽고 나니, 책의 그림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네가 갑자기,
"엄마 나, 나도 읽어볼래!" 하더라.
그래서,
"아가, 어미가 읽어볼 테니, 따라 해볼래?" 하곤, 둘이 같이 읽기 시작했지.
"모자가 어디로 날아갔지?"
"모자가 어디로 날아갔찌이~"
한 페이지에 한 줄씩 있는 책이었는데, 다 읽으니, 대 여섯 페이지가 한 권이었어
그걸 어미가 한번 읽고, 네가 한번 따라 하고, 그렇게 서너 번했지.
그리곤, 퍽 아쉬워하는 너를 책상에 두고 어미는 저녁밥을 준비하고 있었어.
잠시 후 방에서 너 혼자 조용히 소곤소곤 뭐라고 하더라.
무슨 소리인가 하고 어미는 살금살금 너에게 가보았다.
그런데,
"모.자.가. 어.디.로. 날.아.갔.찌이~, 항.아.리. 뒤.에. 있.나아~" 라며,
네가 한 글자 한 글자 고 작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책 한 권을 다 읽는 게 아니겠니.
자라는 내내 학습지 한번 안 하고, 어린이집도 안 다녔던 너였어.
늘, 어미랑 손바닥, 발바닥에 물감 칠갑을 하고, 미술 놀이나 하던 너였고.
또, 놀이터에서는 어미 얼굴에 기미가 내려앉도록
오랜 시간, 그네를 밀어라, 시소를 높이 더 높이 뛰라 했던 너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넌,
작은 방 한쪽에 혼자 숨어서 수줍은 듯이 한글을 읽어나갔다.
어미가 읽어주던 책을 그리도 좋아하던 너.
어미의 목이 쉴 때까지 똑같은 책을 읽고 읽으라고 했던 너는,
어느 날 그렇게 신기하게도 혼자 책을 읽었다.
그 후 너는, 글을 몇 자씩 쓸 수 있게 되자,
'엄마 사랑해'라는 글자를 가장 먼저 써서 어미에게 주었고 말이야.
너는 늘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한글을 배울 때조차 말이야.
근데, 아가.
지금 생각해 보니,
네가 의미도 모르는 한글을 읽다가 말고, "엄마 항아리가 뭐야?"라고 물었을 때,
말로만 설명하지 말 걸 그랬어.
어미가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너를 데리고
항아리가 가득한 곳에 가 실컷 놀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미는 그땐 몰랐어.
또, 라디오를 본 적이 없는 네가 "엄마 라디오가 뭐야?" 했을 때
만 원짜리 라디오라도 하나 사서 너랑 채널을 돌려가며,
재밌게 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기도 해.
아가, 참 아쉽게도 그땐 몰랐던 걸 어미가 지금은 안다.
너는 이미 무처럼 쑥쑥 자라나고 성장해버렸는데 말이다.
이렇게 어미는 늘, 너보다 더디게 성장하고 있어.
아가. 그래도 어미는,
매일 결심해.
내일은 오늘보다 1mm라도 더 나은 어미가 되겠다고 말이야.
아주 다정한 할미가 되겠다는 결심도 하고 말이야.
아가.
오늘도 달팽이같이 느린 어미는,
토끼처럼 빠른 너의 성장을 따라가려고 발버둥 친다.
아가.
그래도 이 어미를 조금만 더 기다려 주련,
어미가 쉬지 않고 너에게 달려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