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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요 Apr 22. 2021

<동물, 원> 야생 동물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

동물, 원(2018)

어릴 적 할머니 손을 잡고 종종 달성공원 동물원에 들러 구경하러 다니곤 했다.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갇혀 지내는 동물들을 보고 불쌍히 여겼던 기억은 꽤 오래 남았다. 나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동물원을 가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다큐멘터리 <동물, 원>은 단순히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을 가여워하기만 했던 내게 난생처음 ‘진짜’ 동물원을 마주하게 했다.


우리는 흔히 동물원에 관해 이야기하면 “동물원은 사라져야 한다.” 혹은 “아무 문제없다.”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물원의 존재 이유와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동시에 드러내며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의 영역으로 문제를 확장한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동물원과 동물들이 처한 현실과 한계를 깨닫고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야생 동물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자 주어진 운명이라 여겼다. 그런 나에게 동물원이라는 공간은 인간들의 즐거움을 위해 야생 동물을 학대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부리가 뒤틀려 먹이를 구할 수 없어 아사하기 직전에 구조되어 청주동물원으로 오게 된 독수리 '하나'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막연히 머릿속에 박혀있던 동물원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동물원에서 하나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야생으로 돌아가지도, 동물 보호소에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하나는 결국 안락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외에도, 삵을 비롯해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종을 보존하는 '서식지외보전기관'으로서의 역할 또한 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몰랐던 몇 가지 긍정적인 기능만으로는 동물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동물원이 가진 공간적, 환경적 한계는 존재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작은 우리에서 사육사들이 아무리 '행동풍부화' 작업을 한다고 해도 그 곳은 야생이 될 수 없다.

맹수들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좁은 우리를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일종의 정신병인 '정형 행동' 패턴을 보이고, 갓 태어난 물범 새끼는 야생에서는 자연스럽게 터득했을 먹이 먹는 법을 배울 수 없어 인공포육을 거친다. 이런 환경에서 동물들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의 후반부, 카메라는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한다.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맹수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도전의 의미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도 가만히 눈을 쳐다보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너희들은 그 안에서 행복하니?"


영화를 보고 글을 다 써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물원은 나쁜 공간인가?'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동물, 원> 또한 그런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영화는 문제를 던져줬고, 이제 남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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