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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요 Jun 01. 2022

대릉원

몇 년 전, 처음 혼자 경주에 왔을 때 우연히 들른 곳이 대릉원이었다. 황리단길이나 왕릉 사잇길의 푸드트럭 거리 같은 것은 없던 때라 그저 경주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왕릉을 지도에서 검색해 찾아온 것이었다. 날이 꽤나 더워지기 시작하던 5월 말이라 도착하자마자 대릉원 옆 골목에서 초계국수 집을 찾아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내내 대릉원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기억나지 않는 제목의 책을 읽고, 어딘가에 저장해 두었다가 지금은 사라져 버린 글을 썼다. 돗자리도 없이 노트북을 펴고 까슬한 잔디밭에 앉아 있는 모습은 누군가 보기엔 꽤나 우스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를 시작으로 매년 경주를 찾다 보니 이젠 경주 터미널에서 월성초등학교가 보이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대릉원으로 향하는 길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지도를 보지 않고도 척척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낯선 길이 점점 익숙해져 더 이상 지도가 필요 없어지는 과정은 꽤나 즐겁고 신비롭다. 언젠가부터 낯선 곳에 여행을 가면 그 동네의 지리부터 익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대충 내려놓고 해가 지기 전까지 동네를 무작정 걷는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 정도 걷다 보면 어느새 지도 없이 동네를 거닐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거리를 걷는 동안 나의 시선이 더 이상 휴대폰 화면이 아닌 거리와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작은 가게들로 향하는 순간 나는 좀 더 그곳을 잘 이해하게 된다고 믿는다. 


현재 위치와 경로까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요즘의 길 찾기는 분명 무척이나 편리하지만, 길을 잃어야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길을 잘못 들어가게 된 작은 골목길이나 허름한 음식점 같은 곳들. 그런 곳에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잠깐이나마 나도 그 일원이 된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도 잘못 찾아간 작은 골목길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큰 사고가 났었고, 그건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은 내가 원한적 없었던ㅡ어쩌면 오래전부터 원해왔던ㅡ것들을 가져다주었고, 이후 많은 것들이 변해 여기까지 왔다. 그 뒤로도 나는 꽤나 여러 번 잘못 찾아간 길로 접어들었다. 몇 번은 좋았고, 몇 번은 나빴다. 앞으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잘못 찾아간 길을 마주할 것이다. 그게 나쁘지 않고 좋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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