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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Aug 19. 2021

서른의 여름

누가 우리에게서 꿈을 앗아갔나


한때는 동방신기 멤버들만큼이나 열정이 넘쳤을 때가 있었다. 이따금 리얼티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이라면 비단 열정이란 동방신기 두 명 중 익히 알려진 한 사람말고 다른 한 명에게도 적용되는 단어라는 걸 잘 알 테지. 그럼에도 나는 알려진 그 한 사람에 붙일 수 있을 만큼이나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였다.


아직 나이가 한 자리 수를 벗어나기 전에도, 상급생이 되고 상급 학교로 진학을 했을 때에도,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첫 취업을 하고 또 심지어는 영국이라는 전혀 다른 문화권의 나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에도 선배, 사수, 상사들이 글자 없이 적어 둔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늘 '적극적이고 열정적임'이라는 코멘트가 있었다.


실제로 하는 것에 비해서 '조금 더' 해 보이는 게 내가 가진 몇 안되는 장기 중에 하나인데 아마 그런 것이 발현된 평가이지 않을까 의심도 없진 않지만 나는 열정적인 게 맞았던 것 같다. 그게 '반드시 해내야 한다'라던가 '꼭 목표를 이루겠다'는 청춘만화 적 사상에서 온 것도 있었을 거고, 내 개인의 목표와는 전혀 상관 없지만 하찮은 능력자 주제에 늘 발목을 잡혀 버리는 '책임감'이라는 것 때문도 있었을 거다. 그게 전자이건 후자이건 뭐든지간에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꿈이 있었다.


아나운서, 가수, 연기자, 소설작가, 드라마작가에서 패션 마케터까지, 나의 꿈은 쉴 새 없이 변천해 왔지만 동시에 항상 그곳에 있었다. 내 머리, 내 마음에. 이것저것에 발 담가 보는 것이 좋았던 어린 날의 나는 관심이 가는 것들을 모두 손에 쥐고 착실히 키워나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을 모으고 쌓아 언젠가는 나만의 유니크한 직업을 해내겠노라 그런 창대한 목표 역시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가졌던 꿈들은 '부자가 될 거야', '대치동에 오십 평짜리 아파트를 살 거야' 혹은 '언젠가는 조인성 오빠한테 프로포즈 할 거야' 같은 부류보다는 대체로 일이나 직업 적인 부분이 컸다. 어떤 일을 하면서 나의 여생을 살 것인지, 그럼으로써 내가 모 분야에 얼마나 높게 올라가 어떻게 이름을 떨칠 것인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내가 꿈을 이룸으로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된다" 라는 누군가의 명언처럼 착실히 나의 분야에서 살아남아 누군가로 하여금 동기를 부여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요즘의 나는 놀랍도록 아무런 의지가 없다. 내가 사랑했던 나의 직업이 마냥 고단하기만 하고, 그렇다고 이 일을 끝내고 다른 일에 도전하자니 머릿속에 남아있는 꿈의 잔여물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이것저것 찔러보기를 가능케 했던 지난 날의 조각조각들은 태풍이라도 맞이한 건지 부산물조차 없이 깨끗하게 머리를 떠났다. 그 빈 공간을 채운 건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탁하고 희뿌연 연기뿐. 그래도 혹시 뭐 하나 남아있는 친구가 있을까 찾아 볼까 하면 연기에 가려서 무언가를 수색하겠다는 의지마저 희미해졌다.


누가 나의 꿈을 훔쳐 갔을까?


열정적이지 못한 나를 보는 건 그간 열정적이었던 나를 봐 왔던 나의 주변 사람들보다, 지금까지의 날들을 그런 사람으로 살아 왔던 나에게 있어 더욱 어색하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꿈이 없다고? 내가? 나는 어디에서든 내가 미래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렇기에 지금 어떤 도전을 하고 있는지 적당한 과장과 적당한 포장 그리고 약간의 MSG를 더해 설명함으로써 관심을 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적당히 가꿔진 나의 가깝고도 먼 미래의 플랜과 그로 인해 달성되는 목표에 돌아오는 타인들의 감탄과 기대는 역으로 내게 거름과 자극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 요즘 친구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해? 남다르네', 그래, 그 남다른 요즘 친구가 나였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하고 싶어?

글쎄, 몰라?

이직은 어디로 하고 싶은데?

글쎄, 몰라?


그 남다른 요즘 친구는 어쩌다가 글쎄와 몰라무새가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꿈이 없다. 뭔가를 하고 싶다, 배우고 싶다, 시작하고 싶다, 는 욕심도 의지도 호기심도 없는 채, 이따금 무엇 하나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 있다 하면 저걸 이제 와서 배워서 뭐 하겠어, 나이 서른에. 하는, 남다르지 못한 그냥 요즘 사람이 된 것이다.


누가 서른의 꿈을 훔쳐 갔을까?


글쎄, 몰라무새는 나 하나가 아니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상당수 포진되어 있다. 유사한 부류로는 결혼이나 하지무새와, 매일 로또당첨만을 기원하는 로또무새, 퇴사만을 기도하는 퇴사무새도 있다. 더 슬픈 건 그들이 딱히 결혼에의 짙은 환상과 희망이 있는 것도, 로또가 진짜 당첨되면 당장 서울에 아파트를 사서 재산을 늘리는 것 외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그렇게 늘린 재산으로 또 무엇을 하겠다는 희망이 있는 것도, 퇴사 이후에 어떤 길을 가겠다는 방향성이 있는 것도 아닌 채 그저 지금의 상황을 끝내고 싶다는 매캐하고 가느다란 소망만 있다는 것이다.



누가 우리의 꿈을 앗아 갔을까?


나이?

회사?

사회?



아니 어쩌면, 십 대와 이십 대 찬란히 빛나고 켜켜이 잘 쌓이던 나의 꿈이 순식간에 증발하게 한 건 어쩌면, 나이와 회사와 사회와 같은 온갖 핑계에 둘러 싸여 더 이상 스스로를 보지 못하게 된, 바로 나 자신이 그 범인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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