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앤 우울
“선생님, 저는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게 넓게 펼쳐져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러니까 어떤 식이냐면,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금방이잖아요. (남쪽으로 직진) 시청에서 을지로도 금방이고,(좌회전) 을지로에서 명동은 금방이고(직진) 명동 에서 충무로도 금방이고(직진), 충무로에서 동대문운동장도 금방이거든요?(직진) 그래서 광화문에서 동대문운동장까지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다고 느껴요. 물론 머리로는 그게 절대 아니란 걸 알지만요.”
"오 그 비유 너무 좋네요. 확 와닿아요."
"고맙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것들도 동시에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지만 결정을 하셔야해요. 우선순위를 정하고 어떤 건 퀄리티를 확 낮춘다는 결정을…“
”…….다 중요한데요.“ (2020.10.28)
지난 주부터 종종 라디오를 듣고 있다. 팟캐스트가 아니고 라디오. 평생 라디오를 스스로 들어본 적이 없다. (아 고등학교 때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 빼고) 그런데 갑자기 왜? 실은 연말 연초 마감을 지나며 심각한 유튜브 폰게임 중독이 되고 말았다. 흥, 웃기는 소리… 언제 이렇게까지 게임 레벨이 높아진거지. 늘 온에어 중인 청각물이라도 재생해서 시청각물을 차단해보자는 발상이 들었다. 어플을 다운로드받아서 KBS 클래식 라디오나 표준 FM, MBC FM4U 정도를 대충 기분따라 돌아가며 듣는데, 콘텐츠 자체의 재미보다도 누군가와 동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뜻밖에 생활에 도움이 된다. 미레나 시술 이후로 약간의 불면도 생겼는데 라디오를 틀면 지금이 정신을 차려야 할 아침인지, 즐거워야 할 오후인지, 잔잔해야 할 저녁 밤나절인지가 즉각 인지된다. 풍경처럼 (보통은 혼란스럽게) 펼쳐지던 하루가 그냥 주파수에 맞춰 흘러가는 단선적 리듬으로 인지된다. 주파수는 한 번에 하나만. 소리는 앞의 소리에 다음 소리가 이어져서 지나가고, 나도 하루를 순서대로 인지할 용기가 나는 것이다. 그 하루 안에는 서울역까지 도착할 수 없더라도 아무튼 시청이든 남대문이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볼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수영장에 갔다. 자유수영 시간의 초급 레인에는 서너명의 사람 밖에 없었다. 배영 팔돌리기 막 배우던 때 멈추고는 몇 개월 만이어서 자유형으로 25미터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전에 성공했을 때는 어땠더라? 몸이 물을 가르는 느낌, 크게 힘겹지 않게 고개를 돌려 호흡을 뱉듯이 들이마시고 다시 적당히 물 속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흐름이, 서툴러도 아주 약간 알 것 같았던 것 같은데. 전혀 감이 안잡혀서 그냥 순순히 키판을 잡고 음-파 리듬에 맞춰 한 팔씩 돌려 두 손을 모아가며 분절적으로 연습하는 단계로 돌아왔다. 리듬은 규칙적으로 반복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겠지? 조금도 규칙적이지 않은 것, 예를 들면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 숫자들의 나열에는 리듬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자릿수 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리듬같은데…
음악과 천체, 영화를 떠올려보았을 때 리듬은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것이고 나는 모든 반복이 좀 어렵다. 하다 못해 술자리에서 다 같이 박수를 쳐도 어느 순간 혼자 어긋나 있다. 음악적으로 박치인 건 상관없지만, 문제는 일상의 모든 반복들이다. 너무 많은 반복. 머리는 한 달에 한 번 자르는 게 적당하고, 샤워는 늘 같은 시간에 하지는 않는다. 점심을 한식으로 먹으면 저녁은 양식을 먹고싶어지고, 이메일은 확인할 수 있는대로 확인하고, 세탁은 몰아서 하는 편. 손톱은 늘 너무 빠르게 자라는 것 같다. 루틴이 있을 때엔 오히려 매일이 다르다. 내가 반복해내는 일들은 대체로 습관보다는 관습과 관성에 가까운 것이다. 리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지각의 리듬, 불면의 리듬. 아니 이 경우엔 패턴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불규칙한 패턴. 같은 양상으로 빙빙 돌며 멈춰있는 네거티브 피드백. 정적이긴 하지만 평온하다고 할 순 없다. 고여서 상해가는 걸.
이번 설에는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해봤다. 라끌렛 그릴을 가져가서 저녁 식사로 해먹었고, 가족들과 함께 맞추려고 무민 500피스 퍼즐을 가져갔다. 엇비슷하게 생긴 500개의 조각 각각에 정확하게 단 하나의 고유한 자리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퍼즐 대부분을 차지한 거대한 무민 그림은 아무 색도 없는 흰색이라서 더 그랬다. 퍼즐 맞추기의 일등 공신은 남동생이었다. 나는 걔가 무언가를 그렇게 오래 열심히 남들과 같이 하는 건 평생에 처음 봤다. 때때로 집요해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두부랑 계란을 절대로 먹지 않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규칙을 갖고 있는 동생이 무조건 제자리에 들어맞아야만 하는 퍼즐맞추기를 좋아할 거라는 걸. 나는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 비디오를 백 번도 넘게 봤다. 내 동생이 2년 정도는 그걸 매일 반복해서 봐야했기 때문이다. 누나는 500피스 퍼즐보다는 우연히 모인 소재들을 꿰어맞추는 퍼즐이 더 재미있어. 어찌보면 거의 정확히 반대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
수영을 마치고 나오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FM에 메시지 보내기 좋은 일상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에 다시 시작하는 만년 작심석달의 취미 생활. 예를 들면 이런 식: 1234님, 새해 맞아 수영을 다시 시작하셨다고요. 이번엔 꼬옥 접영까지 마스터하고 싶어요 라고 보내주셨네요. 네, (프로그램명)도 응원합니다. 저도 한 때 발장구 좀 쳤는데 말이죠. (작가들의 웃음소리) 수영하고 먹는 저녁 아주 꿀맛이겠어요… 네, 너무 상쾌하고 좋네요. 리듬은 아름답고, 패턴은 지겹고, 클리셰는 웃긴 것. 아무튼 잊지 말자. 아무리 우울하고 피곤할 때도 수영은 일단 하고나면 무조건, 무조건 상쾌하다. 정말이지 유려한 선율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라디오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주 2회 수영, 월 1회 진료 정도의 투박한 리듬이라도 모든 긴급 마감을 극복하고 지켜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