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ist findings, 고양이를 부탁해, 스우파
지난 주말 친구들과 인디스페이스에서 재개봉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 정재은)를 보았다. 몇 해만에 가 본 서울극장이었다. 문을 닫았다는 뉴스는 봤는데,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극장 근처에 편의점, 담배가게 하나 연 곳이 없었다.(반면 주말인데도 약국은 열려있었다.) 결국 물을 못 사고 상영관에 들어갔다. 코로나 이후 극장에서 영화보기가 희소한 이벤트가 되어버린 탓에 한때 상영관이 내게 가장 마음 편한 공간이었다는 게 놀라웠다. 두 시간 동안 어둠 속에 꼼짝 않고 거대한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니. 너무 길고… 조금 너무 크지 않아?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주인공들이 웃음소리를 쏟아내며 등장했다. 스크린에 비친 다섯 명의 얼굴이 며칠 동안 집에만 있다가 외출했을 때 마주치는 직사광선처럼 생경했다. 그리고 그만큼 금방 친숙해졌다.
평생 ‘여성 서사’에 목말랐었다. 더 정확히는 ‘여성인 나’의 이야기에.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이되 뻔하지 않은, 그리고 가능한 희망적인 여성의 이야기. 그런 갈증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지 여성 서사에 대한 요구는 사회적 현상이 되었고, 덕분에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주류 채널을 통해서도 서빙되기 시작했다. 이야기들은 오래 갈구해 온 만큼 달고 시원했다. 비슷한 처지의 목소리들이 함께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온오프라인에서 소란스럽게 열광하고 서로의 밥상에 참견했다. 덕분에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 웹툰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히어로물을 맛봤고, 여성이 악당인 안티 히어로물도 맛봤다. 로맨스는 가지 각색으로 새로 씌여졌고, 엄마는 모성애의 신화를 거절했으며, 주인공은 상대 남자와의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매애는 우정, 사랑, 팀워크를 가리지 않고 피어났다.
그런데 ‘나’를 위해 서빙된 이 이야기들이 준 만족감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결핍되어서 본 적도 없는 건 욕망할 수조차 없다. 나는 여성 서사들을 통해 성공하고 싶은 욕망, 억압당할 때의 좌절감, 생존에 대한 불안감, 여자 친구들과 둘러 모여 앉은 밤의 공기를 상기하고 공감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 일리는 없었다. 기존의 플롯에 여성을 대입시켜 재창조한 여성 서사들이나 엄마, 딸, 아내로서의 불행을 폭로하는 여성 서사들은 결과적으로 ‘너무 결핍되어서 아직 본 적도 없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의 마중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점유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로부터 탄생한 이야기. 여성 서사에 대한 갈증은 향유의 욕구를 지나 생산에 대한 욕망으로 향했다.
팬데믹 이후 디자인 정치 플랫폼 Futuress에서 결성한 LiP Collective에는 4개 대륙 27명의 페미니스트 디자인 연구자 및 디자이너들이 모였다. 이들은 외출이 어려워진 시기에 온라인을 열심히 파헤쳤다. 내가 팬데믹 이후 급성장한 OTT 산업 덕에 팝콘을 튀기며 8주 간 <대탈출> 여성팀 버전을 꼬박 챙겨보는 동안, 팬데믹을 맞이해 6주 간 온라인으로 리서치 워크숍을 진행한 여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LiP Collective는 각자 자신이 속한 사회의 페미니즘 간행물 디지털 아카이브를 뒤졌다. 의미 있고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막상 우리가 좀처럼 의미를 찾아 들춰볼 생각은 하지 않는, 대체로 존재 자체도 모르고 지내는 바로 그 아카이브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엔 왜 여성 서사가 없느냐고 다소 성급하게 절망해버리기도 하는… ) Futuress의 아티클에 따르면 27명의 디자이너들은 매주 만나 온라인에서 서로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 대화하고 가끔은 춤도 춘 모양이다.
나는 운 좋게 이 결과물들을 전문 번역본으로 먼저 읽어볼 수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이 전시를 통해 누구나 이 운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해저 광케이블을 통해 물 건너온 해외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최신 자료에는 어딘가의 오래된 흔적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예컨대 튀니지의 30년대 페미니스트 잡지, 구 소비에트 연방의 여성생활지, 보수적인 미국 남부의 유일 무이한 레즈비언 잡지, 프랑스의 여성 무슬림 페미니스트 잡지와 인도 최초 페미니즘 출판사의 연혁, 60년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급진적인 잡지 등등. 그리고 이 중에 알고 있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들이 겪은 난제만은 정말이지 오늘 우리도 경험하고 있는 것 그 자체였다.
레바논의 여성학 저널 <알라이다>는 미국 포드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엘함 나바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페미니즘 저널 <의제>는 흑인 여성의 이미지를 앞세웠지만 결국 백인 엘리트 여성 중심의 공론장으로 수렴되었다.(캐롤린 케초프) 60년대 영국의 진보적인 여성지 <노바>는 피임, 낙태, 성별 임금 격차를 지면에 실으면서 표지에는 성상품화 된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했다.(플로리안 미슬린) 무급 활동가들의 분투로 휴간을 거듭하던 뉴올리언스의 페미니즘 정기간행물 <디스태프>는 결국 자원 부족으로 폐간했다.(마리아치아라 드 레오) 미스터리도 있다. 콜렉티브 멤버인 나이마 벤 아이드는 1930년대 튀니지 페미니즘 잡지 <Leïla>의 표제를 분석했는데, 여기서 이슈는 아랍어의 알파벳 표기인 ï가 때때로 그냥 i로 표기되는 것이었다. 아이드는 묻는다. 이것은 오타인가, 아니면 아랍어 표기를 방해하는 식민주의에 대한 은유적 저항인가? 70년대에 티룸으로 위장했던 프랑스의 지하 페미니즘 문예 조직은 도대체 무슨 돈으로 운영되었던 것인가? 혹시… 여성스러운 디저트와 차를 팔아서?
제도화 과정에서 가부장제의 자원을 유용함으로써 오염되었다는 의심을 사거나, 페미니즘의 기치로 활동하면서도 소수자 여성은 배제시키거나,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성상품화를 혼동하거나, 자원 부족으로 운동의 맥이 끊기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진보의 역사는 사실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이고, 그 지지부진한 흔적은 오늘의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데, 거기서 찾아낸 시사점들이 하나의 타임라인 위에 나열되거나, 그 시대를 대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한 퍼즐의 일부로서 오늘의 독자가 그 시대와 맥락을 유추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시대도 위치도 다른 이 조각들을 feminist findings라는 제목 아래 하나의 결과물로 엮어내는 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사회학적 상상력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고, 이는 곧 이 조각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래를 가리킬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러 간 건 이런 생각을 하기 전날이었다. feminist findings의 교정본을 다시 읽다가 이 영화를 떠올렸다. 둘 모두에 없던 것과 둘 각각에 있었던 좋은 것 때문이었다. 없는 것은 완결적인 이야기다.(작품의 완결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줄거리를 쓰려면 고양이 티티를 주인공으로 삼는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시작과 끝의 여정을 가진 존재는 길에서 지영을 만나 혜주의 선물이 되었다가 다시 지영의 집으로 돌아오고, 태희를 거쳐, 비류와 온조의 집에 도착하는 티티 뿐이니까.
나머지들은 길 위에 서지 못하고 각자의 이야기와 긴장관계에 있다. 증권회사에서 보조 경리 업무를 보는 혜주는 엘리트들 틈의 엑스트라 신세에서 벗어나 성공하려고 주변에 날을 세우고, 조부모와 함께 다 무너져 가는 집에 사는 지영은 제대로 싸워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국가와 가난이 공모한 비극에 발목 잡혀 입을 다문다. 태희는 호기심과 다정함을 나눠주다가 마침내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그 시점에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또렷한 이야기나 갈등의 봉합 대신 영화는 더 좋은 걸 많이 갖고 있었다. 보는 내내 참 잘 찍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연출된 미장센을 보는 게 오랜만이어서 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유튜브 영상들은 일단 찍고 본 소스들을 어떻게든 잘 요리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자극을 계속 줘서 화면에 붙들어두니까. 이 20년 전 영화는 자신이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장르란 걸 확인시켜준다. 타 매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없던 시대의, 그러나 여전히 동시대적인 영화가 관객에게 말 걸어오는 게 참 좋았다. 나는 이 장면을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서 이렇게 찍었어. 모든 장면에서 그런 사려 깊은 의도가 느껴졌다. 창문 깨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붉은 코트를 여민 혜주(이요원)가 또닥또닥 출근하는 첫 장면부터, 반팔을 입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태희(배두나)와 지영(옥지영)을 마주 본 마지막 장면까지. 스크린에 총각김치를 담을 때도, 도시 야경을 담을 때도. 그래서인지 분명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는 여자아이들인데도 바라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극장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내러티브 자본’이라는 단어가 내년 트렌드에 올랐다는 마당에, feminist findings의 글과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면서 우리에게 ‘서사’보다 좋은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말고도 많이 있다. 장면, 지도, 패턴, 시… 위치시키고 묘사하고 전달할 수 있는 것들. 배드 엔딩이나 해피엔딩으로 판가름 지어지지 않는 것들. 맥락을 내포하고 있어서 더 뻗어나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힘을 가진 것들. 예컨대 <소비에트 우먼>을 리서치하려 했던 무즈간 압둘자데는 잡지 본문을 찾지 못하지만 대신 실존 인물과 가상의 영미권 독자들을 떠올려내 냉전 시기에 여성 라이프 스타일 잡지의 지면 위에서 일과 육아의 병행, 패션 트렌드를 논하는 여성들 간의 안부인사를 상상해 낸다. 바젤에서 활동하는 스위스계 이탈리아인 디자이너 노에미 파리시는 리서치 결과로 '행운'을 제출했는데, 1975년부터 1998년 사이 발행된 <해방>이라는 잡지의 기원을 뒤져보다가 당시 잡지에 참여한 디자이너가 옆집에 살고 있다는 걸 발견하고 4시간의 대면 인터뷰 자료를 얻어내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이야기'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느라 약간 분열될 것 같다.(참고로 feminist findings에는 '양쪽으로 찢겨지는 Torn in two direction'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러니까 이제 나 자신 말고 이야기를 두 동강 내는 편이 좋겠다. 요는, 예측할 수 있는, 답이 있는 퍼즐 조각으로서의 이야기 말고, 깨진 도자기 조각 같이 답을 유추해나가야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바란다. 이 새로움은 시점의 문제라기보다 관점의 문제고, 맥락의 문제다. 그러니까 아마 새로운 등장인물들과, 달라진 배경이 주어지면 이야기는 저절로 새로워지리라 믿는다. 다만 그럴 때 우리가 지난 지지부진함을 역사 뒤편으로 잊혀지게 두고 새로움만을 기존의 이야기에 편입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달라진 배경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등장인물'의 힘은 최근 전국을 휩쓴 엠넷 <스트리트 우먼즈 파이터>가 전국민에게 검증해준 것 같다. 프로그램은 닳고 닳은 서바이벌의 문법으로 출발했는데, 크루 리더들은 서바이벌의 장단에 신나게 맞춰주면서도 뻔한 캣파이트와 언더독 서사를 이겨내고 화해와 존중, 반성과 성장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후에 타 매체의 인터뷰를 보는데 그들 모두가 댄서씬이라는 현실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방송의 서사를 이길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기 이전에 춤의 지속가능한 기반에 대한 암묵적 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느 팀 하나도 지게 둘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시청자들도 그런 모습에 대한 피드백으로 아마 이 이야기에 힘을 보탰을 것이다. 처음부터 멋있다고 느꼈지만 이런 이야기가 계속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 점을 확실히 해두고자 한다. 페미니즘을 통해 경험하는 가장 끔찍한 혼란(수사가 아니다)이 가부장제 안에서 느꼈던 억압된 평온에 비할 데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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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전화’ 아카이브 문: http://herstory.xyz
페미니즘 매거진 <이프> pdf 아카이브 http://ifbooks.co.kr/journalIf/magazine.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