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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셔 Aug 17. 2021

일상을 지키는 힘

20200601_ 기억하고픈 어느 날

지이잉

오늘 저녁은 김치찜이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간을 못 봤네, 짤 수도 있어.”

김치 찜인지, 찌개인지 알 길이 없는 그릇을 식탁에 놓으며 그가 말한다.    

  

후룩. 국물을 살짝 떠먹어본다. 짜다.     


“음, 안 짜. 괜찮은데?”     


흰 그릇에 흑미 밥을 턱 푸고, 식탁 앞 모니터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맛있게 먹는 녀석들을 켜고, 수저를 챙겨서 식탁에 앉으면 저녁시간이 된다. 조금 짰던 그 김치찜은....... 사랑의 힘을 싣고 먹기 좋은 음식이 된다. 내 수저에 고기 한 점, 김치 한 점을 두고는 그제야 자기 밥을 먹는 사람, 아침 일찍 일어나더니 오늘 힘들어서 회사를 못 가겠다던 그에게 “열심히 살아!”라는 모진 말을 내뱉고 출근한 나인데, 그도 매일 사랑의 힘으로 견디는 건가라는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밥을 먹은 후 나는 후다닥 소파에 자리를 잡는다. 1시간, 딱 그만큼 나에게 주어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유시간이다. 

그림을 처음 배운 날로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고 그림을 업으로 삼기엔 어려울 것 같아 이직한 나는, 요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결혼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몰입감이 높아 보인다는 신랑의 응원 덕분이었다. 어디로 가든, 나만 만족하면 된다는 그의 말은 수익, 사업성, 기회 등을 떠나 오직 나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한 도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우리가 함께 먹은 그 김치찜을 그리고 있다.


며칠 전 그에게 물었다. "한식 하면 뭐가 떠올라?" 

그는 '찌개'지만 '찜'에 가까웠다던 아버지가 해준 김치찌개가 떠오른다고 했다. 거창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기대했던 예상과 다르게 너무 평범한 단어여서 내심 실망하며 "왜?"라고 물었다. 그는 "이제는 먹을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그가 '아버지'라는 단어를 꺼낼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아버님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게 아버님은 무뚝뚝했던 분으로 시작해서 팔당댐에 놀러 가서 처음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을 토대로 남아 있다가...... 어느 날, 병원에 누운 모습만 보게 되어 실망을 넘어 노력의 시간이 쌓이던 찰나에 한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나답게 밝게 대처한다.


"난 쑨이 해 준 김치찜이 제일 맛있는데!"

"아버지가 해줬던 거랑 비슷해. 그래도 아버지 꺼보단 잘해."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 꺼보다 잘한다니. 


그의 집 풍경이 떠오른다. 햇살이 들어오다 말고 부엌에 닿지 못하지만 어두컴컴한 한쪽 가스레인지 위에 폴폴폴 끓었을 김치찌개. 냄새가 집 안 가득 풍겨 작은 방, 큰 방, 베란다 할 것 없이 가득했을 거다. 그 냄새에 하양이도 거실 바닥을 발라당 했겠지. 5시간 동안 끓인 김치찌개를 냄비받침대에 툭. 내놓으면 어머님, 아버님, 그 시절의 신랑, 그 시절의 여동생이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았을 거다. 밥 먹기 직전, 싸웠든 무덤덤했든 놀다 왔든 간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을 거다. 


머릿속에 떠오른 신랑의 집 풍경과 나와 신랑이 거실에 앉아 밥상에 김치찜 하나 두고 맛있다며 먹었던 날들과 겹친다.


"나는 계속 먹을 수 있는데, 쑨은 이제 못 먹네." 

"그러게."

그가 뱉은 언어에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깊은 속 너머 섭섭함을 어림짐작해본다. 아마 그 기억 속 김치찌개 맛은 실제 기억보다 더 농도가 진해져 있을 것이다. 진하다 못해 너무 짜진 않을까 간을 보며, 그는 슬며시 그 김치찌개의 기억을 아버지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잘 시간이야.”

그림을 한참 그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 잘 시간이 된다. 시계를 대충 한 번 보고 그를 한 번 보고 다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더 그리고 싶으니 대충 건들지 말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고 있자면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상을 지키는 게 첫 번째야."

아무리 유명해지고(물론 난 유명하진 않다.) 돈을 많이 벌어도, 혹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너무 슬프거나 행복한 일이 생겨도 항상 일상을 지키는 게 첫 번째라고 말한다. 빨래를 하고, 콩이 밥 챙겨주고,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그런 일상들 말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 그래서 그 일상을 지키는 힘을 가지게 된 음식. 우리 엄마의 김치볶음밥, 우리 이모의 고등어조림, 우리 아빠의 부대찌개, 내 동생이 해준 감자전......

 

내일도 내일의 일상을 무사히 지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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