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투게더’ (양가위, 1997)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디어 영화 ‘해피투게더’를 봤다. 16년도에 퀴어 영화 추천해달라는 지인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놓고 정작 나는 보지 않았다가 6년 만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상당히 우울할 줄 알았던 영화는 오히려 나에게 자유를 선사해주었다. 보영 (장국영)과 아휘 (양조위)에게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가 있다면 나에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이 있다. 블라디보스톡을 가고 싶었던 건 가장 가까운 유럽이었고 다름 아닌 첫사랑 때문이었다. 슬슬 다시 혼자 여행을 떠날까 고민하고 있지만 엄두를 못 내던 때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갔다 온 사람들의 괜찮은 여행 후기들과 첫사랑이 여행 갔다 온 곳이기에 언젠간 나도 갈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막상 혼자 떠나려니 무서워 날씨가 가장 좋다는 6월 여행을 미루고 미루다 가장 덥다는 8월에 가게 되었다. 안 그래도 더운 여름의 한국을 보냈고, 러시아의 더위에 겁을 먹고 짐을 쌌으나, 막상 도착하니 날이 흐리고 비도 오고 조금은 춥기까지 했다. 게스트하우스 호스트 말로는 내가 오기 전까지 너무 더웠는데, 내가 온 주에는 날이 좋지 않다고 했다.
내가 여행을 떠난 이유는 그 당시 일과 사람들이 너무 지긋해서 어떤 연락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었고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타인이 됨을 느끼고 싶었다. 게다가 몇 년 전 유럽 배낭여행에서 느낀 건 때론 고독이 자유롭게 만든다는 이유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첫사랑을 이해하고 싶었다. 첫사랑이 보고 경험한 것들을 나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럼 내가 나만 생각하느라 몰랐던 첫사랑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블라디보스톡에 오면 끝나버린 관계를, 첫사랑을, 나를 정리하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 내내 나의 최애 장소였던 해양 공원에서 첫사랑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영감 받은 이야기를 생각했고, 언젠간 꼭 새드 엔딩인 로맨스를 쓰리라 다짐했고, 무엇보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여행으로부터 한 달 뒤에 첫사랑에게 전활 걸어 “러시아의 아메리카노는 정말 맛이 없었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떠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휘는 갑작스럽게 떠나고 다시 돌아와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는 보영을 떠나 아휘는 자신을 좀먹었던 관계에서 벗어났다. 이과수 폭포에서 항상 보영과 함께 있는 걸 상상했던 아휘. 그는 혼자 와서 슬프다고 했지만, 거친 폭포에 보영과 나눈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장과 술집에서 녹음기에 아휘의 슬픔을 담아 장이 그 대신 그의 슬픔을 세상의 끝에 두고 왔다. 그렇게 아휘는 이별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블라디보스톡 해양공원에서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첫사랑과의 관계, 그가 보여준 진심과 무심한 듯 다정함을 그곳에 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 후 한 달 뒤에 당신을 좋아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나서야 대만 지하철 좌석 맨 앞에서 이어폰에 꽂은 음악을 들으며 살짝 웃는 아휘처럼 나도 드디어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