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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시환 Sep 18. 2022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이별 후 꿈에 대하여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

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도시가스 (문학과 지성사)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꿈에서 깨어 아침을 맞이하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잊어버리고 바로 아침 루틴이 시작된다.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하고, 침대에 일어나 씻는다. 하지만 꿈에서 전 연인이 나온다면 얘기가 다르다. 이상하게도 같은 루틴, 비슷한 일상대로 하루를 보내는데, 하루가 뒤숭숭하고 찜찜하다. 다른 꿈은 잊어버리면서 전 연인 꿈만큼은 꿈에 그가 나타난 이유를 알고 싶다. 꿈은 현실과 반대고, 내가 아직 상대를 잊지 못해 꿈에 나온 것이고 혹자는 그가 나를 보고 싶어 해 내 꿈에 나온다는 것처럼 꿈보다 해몽인 경우가 많다. 이별할 땐 영영 끝인 것처럼 서로를 보냈는데, 꿈에 나와 한바탕 나를 괴롭히고 가면 아닌 걸 알아도 온갖 미사여구와 의미부여로 한 번이라도 붙잡고 싶어 진다.


이수명 시인의 <꿈에 네가 나왔다> 화자는 어떨까? 총 세 번에 걸쳐 "꿈에 네가 나왔다"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자는 상대를 잊어가는 것 같다. 첫 번째 꿈엔 화자의 전 연인이 누더기를 입고 있다. 사랑할 땐 모든 걸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가, 이별 후엔 어떤 소식도 모른다. 잘 지내길 바랐다가, 하지만 어떤 경로로 전 연인의 소식을 듣는다면 그게 좋은 소식이든 좋지 못한 소식이든 어떤 경우에도 신경 쓰일 것이다. 아무리 상대의 행복을 빌어도 전 연인이 잘 지내면 괜히 나는 초라한 기분을 느끼고, 전 연인이 못 지내면 그것도 그거대로 속상하다.


두 번째 꿈엔 "네가 자연스럽게 지나가서"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화자가 앞에 있음에도 전 연인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화자는 그 모습이 쓸쓸해서 돌멩이를 줍는데, 빛을 '다' 잃었다. 이는 화자와 전 연인의 관계를 보여준다. 원석에 각각 의미가 있듯이 우리의 사랑이 마찬가지로 사랑할 땐 우리의 사랑이 제일 특별하고 제일 낭만적이고 다시는 없을 것처럼 뜨겁다. 하지만 원석은 가치가 없으면 빛을 잃어버리고 버려진다. 마치 끝나버린 연애 같다. 가장 의미가 있던 우리의 사랑이 나와 네가 되고, 알고 보니 평범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에 의미가 없어져버린.


그 이후, 이 둘은 돌벽 앞에서 재회한다. 화자는 돌벽이 위험하다고 하고 화자의 전 연인은 산책 중이라며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이 둘의 돌벽이 이별이 원인이었을까? 돌벽이 이들을 가로막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돌벽이 무너지면 둘은 재회할 수 있을까? 돌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불가능한데, 이 둘은 돌벽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 번째 꿈은 앞선 꿈들과 달리 내용이 없다. 앞선 꿈들은 기분과 내용을 상세히 기억할 정도인데, 이번 꿈은 "아주 짧은 꿈"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꿈은 이별한 직후, "왜 누더기 옷을 입고 있니" 물을 정도로 상대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고 두 번째 꿈은 "빛을 다 잃은 돌멩이"와 "돌벽 앞"과 같이 객관적으로 이별을 돌아보고 받아들이고 있다. 세 번째 꿈에서야 내용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전 연인도, 그가 나온 꿈도 사소해지고 있다.

  

꿈은 내가 경험하고 상상한 것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꿈에서 전 연인이 나온 꿈만큼 괴로운 것은 없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 중 일상에선 괜찮다가도 그가 꿈에 나오고 나면 다시 이별 1일 차가 되어 잊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하루의 시작도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고, 이별의 상처는 더디게 아물어 가는 것 같다. 연락할 수도 없고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기분은 나를 비참하게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바엔 꿈에 나올 때마다 '꿈에 또 나왔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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