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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선 Jun 14. 2021

사랑, 선명하지 않은 것

영화 '첨밀밀'을 다시 보고

 1996년 개봉했던 '첨밀밀'이라는 영화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아마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영화는 보지 못했고, 당시 거리와 방송 매체에서 많이 들려오던 등려군의 노래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아마도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삶의 경험도 사랑의 경험도 부족했던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오로지 이요(장만옥)와 소군(여명)의 사랑만 보였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나고 이 영화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했는지 의문을 가지며 비디오를 껐던 기억이 난다. 긴 시간이 흐른 뒤, 나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이요와 소군이 재회하던 마지막 장면뿐이었으니 십 대의 관객에게 영화 '첨밀밀'은 사치였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가 눈에 띄어 -내용도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기에- 다시 보게 되었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과거에 내가 보았던 그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사랑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심지어 소정을 배신한 소군의 감정까지도 이제는 나쁘게만 보이지 않았고 이해되었다.

  나이가 충분히 들기 전까지 나는 '사랑'은 점과 점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듯 명료하고 선명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야만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줄 알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사랑이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모호해져 갔고 설명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삶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이란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소군은 약혼녀인 소정에게 보내줄 선물인 팔찌를 이요에게 함께 사러 가자고 하며, 해맑게 같은 팔찌를 선물할 만큼 순수한 사람이다. 영화는 이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상처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미 이요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으면서도, 소정이 다른 남자와 이렇게 만난다면 슬플 것 같다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이 남자의 순진무구함은 이요를 떠나보내기에 충분했다.


  소군을 떠난 이요는 다른 남자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받아주고 돌보아준 영표 곁에 머문다. 이요의 마음속에는 소군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지만, 영표가 과거에 여자를 많이 만나봤다는 말에 질투를 느끼며 발끈하기도 한다. 참 모순되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모순된 감정도 존재한다.


 소군과 재회 후, 이요는 소군에 대한 사랑이 깊음을 깨닫고 영표에게 이별을 고하러 가지만, 끝끝내 내뱉지 못하고 소군을 항구에 두고 영표와 함께 배를 타고 떠난다. 이요는 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미안함이든 고마움이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마구 뒤섞인 그 미묘한 감정도 사랑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감정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영표와 이요의 사랑도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그 또한 다른 방식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았을 때 그 어떤 사랑보다도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소군의 고모인 '로지'의 윌리엄에 대한 사랑이었다. 로지는 윌리엄과 젊은 날 근사한 호텔에서 저녁식사 한 끼를 한 것이 전부였지만, 노인이 되어 죽는 날까지 그 추억 하나를 곱씹으며 홀로 사랑했다. 하지만 로지는 죽는 순간에 결코 슬퍼하지 않았다. 평생 그리워하며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을 잊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가 있으니 상관없다고 했다. 로지의 모습을 보며 나태주 시인의 '내가 너를'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로지의 사랑은 이미 혼자만의 것으로도 차고 넘치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하나의 선명한 색을 지니고 있지 않다. 여러 가지 색들이 뒤죽박죽 섞인, 그래서 하나의 단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그 어떤 이름 모를 색을 띤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다. 알아보기도, 설명하기도 참 어렵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고, 실수와 후회가 뒤섞이고,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지극히 서투른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인간미 가득한 아름다움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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