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는 사막이 없다. 강수량보다 증발량이 더 많아야 하는 등 극단적인 기후조건이 필요하기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연평균 강수량 1,300mm 안팎을 자랑하는 이 작은 땅엔 사막이 생길 여유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대자연, 사막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권 시민으로서 빌딩이 시야를 가로막는 도심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면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보이는 것은 산뿐이다. 심지어 국내 어디를 놀러 가더라도 버스나 기차 밖으로 보이는 것은 역시 산뿐이다. 지평선을 보는 일은 쉽지 않으며 해변으로 가야 수평선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과연 사막의 지평선은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다.
이카시내에서 와카치나로 가는 길은 의외로 평범했다. 마치 리마 공항에서 미라플로레스 가는 길처럼 그저 평범한 도시 풍경. 건조한 기후와 흩날리는 모래쯤은 나스카도 비슷했기에 나는 와카치나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막 모습이 기대보다 별로면 어쩌나, 생각보다 작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카시내에서 와카치나까지 정확히 5분 만에 달라진 풍경
도심을 벗어난 시골 풍경. 건물 사이로 보이는 얕은 모래 언덕 사잇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이 모래언덕으로 가득해진다. 그렇게 몇 분 만에 사막의 한가운데에 내렸다. 드디어 사막, 그리고 그 사막 한가운데의 물웅덩이 오아시스!
택시기사님은 많은 관광객이 반드시 들리는 크루즈 델수르 사무소가 있는 건물 앞에 우리를 내려줬다. 중간에 터미널을 다시 오고 간 영향으로 서비스 요금이 조금 추가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다 해도 고작 15 솔 정도이니 비싸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꽃청춘에서는 7 솔에 이동했는데 우리 택시는 깨끗한 블랙 세단이었으니까 만족 - 버기카 예약을 문의할 겸 크루즈 델 수르 사무실로 들어가니 버기카 예약은 물론이고 짐까지 맡아준다고 한다. 이것이 1석2조! 오후 시간의 버기카를 예약한 우리는 귀중품만 소지한 가벼운 차림으로 오아시스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렇게 그림 같을 수도 있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바라본,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와카치나 오아시스의 풍경은 정말 신기했다. 사방천지 모래산 밖에 안 보이는 곳에 대체 어디서 물이 나는 건지 작지 않은 규모의 웅덩이가 있는 것과, 그 오아시스 주변으로 둥글게 자리 잡은 음식점과 열대 나무들까지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한 와중에 '코레아나?'를 확인하고 "안녕하세요!"를 외치는 와카치나 주민마저 신기할 지경. 인사는 그렇다고 쳐도 대체 그들의 발음은 어쩜 저렇게 까지 좋은 것일까. 지나가던 한국인들이 발음 교정이라도 한 건가. 심지어 오아시스 노점에 'water'나 'agua'가 아닌 <물>이라고 한글로 쓰여 있을 정도니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빈도수를 미루어 짐작해볼 만하다.
첫 번째 계획은 '오아시스 주변에서 식사하기'.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디가 맛있는 집인지 사전조사가 없었기에 우리는 주변의 식당들을 훑어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발견된 '영어 메뉴'를 제공하는 레스토랑! '페루에 가면 로모 살 타도를 먹자'라고 약속했던 것이 떠올라 메뉴 이름에 '로모 살타도'가 있고 영어가 잔뜩 쓰여있어 안심되는 레스토랑으로 결정했다.
비영어권 국가에선 영어만 봐도 행복하다
영문 메뉴판 덕으로 로모 살 타도와 야채 볶음밥, 멜론 주스를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유난히 동양인이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흠, 희한하네'라고 생각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사장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테이블을 '톡톡' 친다. 주문이 뭐가 잘못됐나 싶어 바라보는데 흩어져있는 3개의 테이블을 하나씩 가리키며, "(저기) 코레아노, (여기) 코레아노, (우리) 코레아나." 한다. 뭐여? 손님의 80%가 한국인이야? 서로를 보며 놀랄 새도 없이 사장님의 선창 "안녕하세요."와 함께 현장에 있던 한국인들이 "안녕하세요."를 외치며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이웃집에 누가 사지는 지도 모르는 요즘 같은 때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들과의 정겨운 인사가 낯설지만 한편 즐거운 기억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는 페루 여행 중에 몇 번이나 마주치게 되고 마주칠 때마다 항상 '그거 얼마예요?'를 묻던 한국인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 후일 우리는 '꽌또(Quanto=얼마예요) 아저씨'라고 불렀다 - 성인 여성 둘, 남녀 어린이와 함께 있던 그분은 일행도 많고 한국인은 잘 하지 않는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라 눈에 띄었는데, 조금 전까지 다른 테이블의 한국인 청년들과 대화를 열심히 하는가 싶더니 우리가 음식을 절반쯤 먹었을 때 우리 앞으로 나타나 뭘 주문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맛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우린 시킨 음식이 맛있기도 했고 양도 많았기에 '조금 드셔 보시라'며 깨끗한 쪽으로 나눠 드릴까 물어보니 더 이상 참지 못한 부인이 "제발, 그만 좀 해."라고 작게 역정을 내시며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시는 것이 아닌가. 불편하진 않았는데 괜히 남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분은 음식의 맛을 물어보면서 '페루 소고기가 한국에 비해 많이 질기다, 그것은 그렇지 않은가' 하며 물어보신 것을 봐선 우리보다 아는 게 많아 보였는데도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과 함께여서 인지 뭐 하나라도 더 좋은 걸 추천받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대단했다. 그런데 정말 그분 말대로 이후 페루에서 먹은 모든 소고기는 한국에서 먹은 것보다 질겼다.
기대보다 괜찮았던 로모 살타도
소고기는 좀 질기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고 야채 볶음밥은 완전히 우리 입맛. 멜론 주스는 모든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당도 높은 과일주스였다. 햇살 좋은 날 야외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이 것을 두고 무릉도원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다 싶은 한가로운 오후였다.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음료로 배를 잔뜩 불리고 나온 오늘의 와카치나 날씨는 모자를 벗었다간 정수리가 빨갛게 익을 정도로 맑음. - 진짜로 정수리가 탔다 - 아무리 더워도 이 귀한 구경을 포기할 수는 없지. 하늘은 이렇게 맑을 수 있을까 싶게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었고 저 멀리 사막에 매료된 누군가는 걸어서 모래언덕을 오르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어딜 가시는 거죠, 그쪽은 모래뿐입니다만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아이보리색 사막이 펼쳐지고 그 아래 녹색의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채로운데 와카치나의 건물들이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움을 더하고 있으니 이보다 이국적일 수가 없다. 솔직히 너무 더웠고, 지쳤고, 아직 나스카 경비행기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나는 기력 없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셀피도 찍고 하는 것을 보니 함께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왔다면 또 어딘가에 늘어져서 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고 허송세월을 했겠지. 부족한 체력을 이겨내고 다시금 사막을 즐기게 한 것은 에너자이저와 같은 알의 힘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