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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Aug 17. 2021

친구라면서 왜 화를 내요, 아미고

언어의 장벽 앞에 폭주하는 이카의 택시 드라이버

 예마야에 돌아와서는 이카로 가는 버스 시간 때문에 서둘러 짐을 챙겨 나오기 바빴다. 주인아저씨는 숙소 앞까지 따라 나오셔서는 택시가 올 때까지 함께 기다리며 말을 붙이셨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를 물어보시더니, 이카에는 맛있는 와인이 있는 양조장이 많다며 꼭 체험해보라고 추천해주셨다. 당일에 이카에서 다시 리마로 돌아가야 하는 빡빡한 우리 일정을 봤을 때 유용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단 하루 묵는 여행자를 끝까지 신경 써주시는 모습에 감사했다. 다시 나스카에 오게 되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다른 숙소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예마야에 오고 싶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나스카 라인에 밀려 잊혔던 허기가 쏴아아 밀려왔다. 이 정도로 허할 때는 쌀이 들어가 줘야 하는데... 기내식 이후부터 이 날 아침까지 '식사'로 먹었던 건 샌드위치와 피자뿐. 물론 둘 다 평소 좋아하는 메뉴고 맛있게 먹었지만 우리의 위장은 쌀과 따뜻한 국물에 최적화된 토종이었다는 사실을 이때 실감했다. '신토불이' 노래는 진리였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골국 파우치를 챙겨 왔지만 가는 데마다 정수기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다 - 이때까지 해외여행을 갈 때 커피포트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해봤다 -  터미널 인근에 제법 있었던 양식당들을 훑어보다가, 도무지 땡기지 않아 따뜻한 차로 속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는 평소 같았으면 내가 환장하고 달려들 당근 케이크, 오렌지 케이크 등 각종 케이크를 비롯하여  빵, 쿠스께냐 맥주, 잉카콜라까지 진열되어 있었으나 전부 외면한 채 메뉴판에서 tea 카테고리만 스캔했다. 고산병에 좋다고 알려진 코카 차와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보는 캐모마일이 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익숙한 그 이름 두 개를 골라 주문했는데 직원이 찬장에서 꺼내는 건 잎차가 아닌 티백이었다. 티백이라면 마땅히 따뜻한 물이 딸려올 터, '온수'라는 단어와 동시에 배낭 속에 잠들어있는 사골국 생각이 번쩍 났다. 티백 담그지 말고 물 따로 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급하니까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고 둘 다 입만 뻐끔거렸다. 다행히도 직원이 우리의 생각을 읽은 건지, 이 집은 원래 이렇게 주는 건지 티백과 온수 컵이 각각 나왔다. 드디어 고향의 맛을 보는구나! 사골국 제조를 위해 컵을 든 손은 조심조심, 다리는 제법 날쌔게 놀려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에 들어왔다. 대기석에는 아무도 없고 온수는 아직 따뜻하다. 사골국 파우치를 쥐어짜서 휘휘 젓는 동안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사골 냄새에 뱃속이 편안해졌다. 그래, 이 맛이야!


고향의 맛 제조 중

 

 어제 아무렇지 않게 우리 좌석을 날려먹었던 크루즈 델 수르는 웬일로 약속을 지켜주었다. 아마도 이동 거리가 짧기도 하고, 이 시간에 나스카에서 이카로 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국내에서 미리 예약해서 얻은 2층 버스 맨 앞자리는 시원시원하게 뻥 뚫린 전망과 다리를 다 뻗을 수 있는 좌석 간격이 보장되어 만족도 100%였다. 어제도 이렇게 할 수 있었는데 눈 뜨고 코 베인 걸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이틀 연속 당하지 않은 게 어디냐 싶다.

 어젯밤 달려왔던 도로를 그대로 되돌아가는 길, 사방천지 풀 한 포기 없는 건조한 황토색 땅이 한 가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긴 시간 여행할 때는 창밖에 온통 푸른 산과 논밭만 가득해서 녹색 멀미가 날 것 같은데 여기는 끝없이 펼쳐지는 황토색 세상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아무것도 없는 게 낯설어서 이것도 이국적이라며 사진을 찍었다.

 

온 세상 황토색 모래 세상

 

 아침을 다 바쳤던 나스카 라인 표지판을 지나칠 때, 근처에 전망대가 보였다. 나보다 먼저 페루 여행을 다녀온 오빠는  전망대에서 나스카 라인을 봤다고 했는데, 높이를 봐서는 그 많은 지상화를 한눈에 또렷하게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 완벽하게 잘 볼 수는 없을 거다, 돈이 하나도 안 아깝다며 함께 감격의 순간을 되새김질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어제 그 긴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배낭이 완벽하게 지켜졌던 관계로, 오늘부터는 맡기는 순간부터 배낭의 존재를 잊고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좌석 예약은 못 믿어도 보관 시스템은 믿을 수 있는 크루즈 델 수르 되시겠다.

   

 한참 자다가 눈을 떠 보니 황토색 세상은 사라지고 장난감처럼 작고 알록달록한 모터 택시들이 가득한 도로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북적북적한 틈새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는데, 교통정리도 옥수수 장사도 아닌 저글링을 하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냥 저글링이다. 갓길도 아니고 차량 가득한 도로에서! 하는 사람이나 보는 운전자들이나 위험해 보였는데 정작 당사자들한테는 그저 그런 일상인지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지나가긴 했다. 부디 무사히 일당을 벌고 조기 퇴근했기를 빈다.


위험천만 도로 위의 저글링


 이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미처 땅을 밟기도 전에 사방에서 호객 소리가 시장통처럼 울려 퍼졌다. 리마 시내에서 들었던 호객은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 단연 귀에 쏙 들어오는 소리가 있었으니, 받아라 모국어 공격!

 "친구~ 친구! 와카치나?"
 쳐다보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간다. 뇽도 다르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얼빠진 한국인 둘을 놓치지 않고 앞을 딱 가로막더니 한 명씩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말했다.
 "오 솔, 오 솔, 십 솔!"
 Five Sol도 아니고 오 솔? 둘이 합쳐 십 솔이라니, 기사님 눈높이 영업 제대로다. 둘 다 빵 터지는 걸 놓치지 않은 기사님은 더욱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와카치나, 십 솔!'을 외치며 앞장섰고, 한국말 영업에 완전히 홀려버린 호구 둘은 이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뭘 하기로 했었는지 홀랑 까먹은 채로 택시에 올라탔다.


 탑승 초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기사님은 예마야 아저씨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우리에게 말을 붙이려고 노력했다. 본인을 가리키며 amigo(친구), 우리에게는 amiga(친구-여성형 명사)라고 하며 간단한 에스빠뇰 소개와 함께 대화의 물꼬를 텄고, 우리는 비록 유아 수준의 대화일 망정 이런 게 해외여행의 묘미가 아니냐며 마냥 즐거워했다. 하지만 세계 평화를 싣고 화목하게 달리던 택시는 다음 문장에서 거대한 장벽을 만나고 말았다.

 "너희들 와카치나에서는 얼마나 놀 거니?"

 와카치나! 그렇다, 우리는 지금 와카치나로 가고 있다. 가서 맛있는 과일 주스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하고, 버기카 씽씽 타고 사막에 가서 오아시스도 구경해야지! 그러다 보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가만있자 리마행 버스는 몇 시에 타기로 했더라?

 아 맞다. 버스!

 와카치나에서 제대로 놀려면 버스 예약 변경해야 하는데! 그냥 택시를 타버렸어!



 

 사연인즉, 우리는 페루에서 타는 모든 교통수단의 티켓을 국내에서 미리 예매했다. 짧은 기간 동안 계획한 모든 일정을 수행하려면 티켓 매진이나 운행 시간표 변경 등의 변수를 최대한 없애야 하기 때문이었다 - 물론 현장에서 뒤통수를 제법 맞았지만, 그나마 예약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 나빴을 것이다 - 그런데 이카에서 리마행 버스를 타는 시간을 너무 촉박하게 잡아서, 그 시간에 맞춰 움직이려면 와카치나에서 밥 먹고 사막을 보자마자 돌아와야 할 판이었다.

 그런 고로 이카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일단 버스 시간을 변경하고 나서 택시를 타자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는데, 호객 소리에 홀랑 까먹고 택시에 올라탔다가 10분이 흐른 뒤에야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이를 어쩌나. 엎질러진 대로 그냥 두자니 와카치나 관광이 망할 것이고 도착해서 다시 택시를 타고 터미널을 찍으면 쓸데없이 시간을 버리게 된다. 우리는 돈을 몇 배로 내도 좋으니 일단 이 차를 돌려서 예약을 변경하고 다시 출발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죄송하지만 터미널에 들렀다가 와카치나로 갈게요. 버스 시간을 바꿔야 해서요. 그만큼 요금은 더 낼게요."

 요점만 간략하게, 최대한 공손한 얼굴로 요청했으나 좀 전까지 세상 친절하기 이루 말할 수 없던 기사님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터미널로 간다고? 안 돼, 와카치나 가야 돼."
 "와카치나에 갈 건데, 그전에, 터미널 잠깐만 들러주세요."
 "터미널 안 돼, 와카치나 가야 돼."
 "와카치나 간다니까요. 터미널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갈 거예요."
 못 알아들을 거면 차라리 다 못 알아들을 일이지, 기사님의 리스닝은 왜 편도만 가능하단 말인가. 아미고, 아미가 배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택시 안에는 북풍한설이 휘몰아쳤다. 이대로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돈은 돈대로 내고 와카치나 구경도 망하는 건가, 에스빠뇰 공부 안 한 죄가 이렇게나 컸다니... 회한으로 땅굴이나 파는 나와 달리 포기를 모르는 뇽은 기사님과 팽팽하게 맞섰다. 아미가의 표정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기사님은 대꾸를 멈추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바꿔주겠다며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뇽이 전화기를 건네받고, 요구사항을 얘기한 다음 다시 기사님께 넘겨주는 그 짧은 순간이 천 년 같았다.

 직원과 통화를 마친 후 우리를 돌아보는 기사님의 표정은 처음처럼 밝진 않았지만 그래도 얼추 아미고 모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어색해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으나, 터미널을 향해 다시 운전대를 돌려주심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출발 10분만에 돌아온 이카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

 배낭은 택시에 그대로 놔둔 채 터미널 안에 들어왔다. 좀 전까지 택시를 돌리네 마네 다퉜던 기사님이 영 미덥지 않았던지, 뇽은 티켓 예매를 하는 동안 택시로 돌아가서 우리 짐이 무사한지 보고 오라는 지령을 내렸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차들 중 우리 택시를 찾는데, 누군가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싶어 계속 택시 주변을 배회하는데, 또 같은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기사님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배낭의 안위를 걱정하듯, 그 역시 우리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내심 신경 썼던 모양이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걱정 말고 천천히 다녀오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까 그렇게 성질냈던 사람 맞나, 싶게 놀랍도록 인자해진 그의 표정을 보증 수표 삼아 이만 터미널로 복귀하기로 했다.  

 

 그 사이 뇽은 티켓팅 지옥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표를 바꾸고 싶다고 하니 취소가 안 된다고만 하고, 그럼 취소 수수료를 내고 다음 시간대 표를 사겠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다. 본인은 영어를 못하니 옆에 있는 영어 가능한 직원한테 이야기하라는데, 정작 그 직원은 다른 직원과 실컷 수다를 떤 다음에야 응대를 시작했다. 정확히 영화 <주토피아>에서 주디가 나무늘보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도 어쩌겠는가, 키는 나무늘보가 쥐고 있는 것을. 기다림 끝에 나무늘보 직원에게서 받은 솔루션은 다음과 같았다. 예매한 티켓을 취소해도 환불은 안 된다, 하지만 다음 시간대 표를 산다면, 먼저 예매했던 티켓 금액의 일부만큼 할인을 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게 취소 수수료를 내고 티켓을 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늘의 영어회화는 여기까지다. 모로 가도 티켓만 바꿨으면 된 거니, 다시 친절해진 아미고 기사님이 마음 바뀌기 전에 와카치나로 달려갔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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