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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Aug 13. 2021

뜻이 있는 곳에 나스카 라인이 있다.

가까이에서 봐야 제 맛입니다. 나스카 라인!

 지난밤. 언제나 배부르게 먹고 머리를 대면 잠드는 나와 달리 환경이 바뀌면 잠을 설치는 뇽은 모기 소리에 금방 깨버렸고, "모기가 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천년의 잠에 들 뻔한 나마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기! 황열병! 여기서는 응급실에 가도 말이 안 통해! 감히 남미에서의 첫날밤에 맨몸으로 잠들려 했던 겁 없는 뇽에게 모기 팔찌를 채우고, 침대 옆의 협탁 위에 깔라만시 비누를 꺼내 놓았다. 한바탕 퇴모 의식(?)을 치른 뒤, 신기하게도 조용해졌다. 모기 팔찌, 깔라만시 믿습니다!  


 모기 팔찌와 깔라만시가 보우하사 별일 없는 밤이 지나고, 대망의 나스카 라인 데이가 밝았다. 눈 뜨자마자 확인한 날씨는 매우 맑음! 여행 중에는 날씨만 좋아도 절반 이상의 성공이다. 경비행장까지 픽업해주는 차량은 7시 30분까지 오기로 했는데 성질 급한 한국인 둘은 15분부터 나와서 집 앞을 서성거렸다. 경비행기가 많이 흔들려서 멀미를 유발할 것이므로, 반드시 빈속으로 타라는 주인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식사를 생략했더니 준비가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것.

 전날에는 온통 암흑이었던 동네가 날이 밝으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골목 끝에서 끝까지 걸어갔다 오는 동안 파란 하늘 아래 눈이 시리게 강렬한 붉은색 꽃들이 거리에 가득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소설 속에서나 접했던 이름, '부겐빌레아'였다. 원산지가 남미라는데, 그래서 우리나라 개나리처럼 지천에 널렸나 보다. 가로수로써 정갈하게 줄 지어 서 있기도 하고 담장을 타고 내려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피빨강, 부겐빌레아


 숙소 옆집에는 철조망 안에 덩치가 이만한 개가 두 마리나 있었는데, 전날 밤 암흑 속에서 나타난 이방인 둘을 보고도 짖지 않는 침착한 녀석들이었다. 아침에도 마찬가지로, 가까이 다가가도 여전히 짖지 않고 딴청이었다. 페루 여행 동안 거리에서 마주친 개들은 대부분 들개처럼 몸집이 크고 혼자 돌아다녔는데, 희한할 정도로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무 데나 누워 잠들어있거나 자기 갈 길을 갈 뿐, 사람이 근처에 있어도 다가와서 꼬리를 흔들거나 으르렁대지 않는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큰 개를 봤다면 무서웠을 텐데, 여기서는 사람이나 개들이나 자기 할 일만 하는 모습이 서로 괴롭히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 같아 좋았다.   


 이른 아침부터 빵을 파는 노점도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이 먹는 빵맛이 어떨지 너무 궁금했지만 경비행기 생각만 하며 꾹 참았다. 지금 생각으로는 포장해뒀다가 나중에 맛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이 아침을 온전히 나스카 라인에 바치리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디 식사뿐이랴,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키미테도 구입해서 붙였다. 아아, 마치 건강검진 전날과 같은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구나!

 다시 예마야 입구로 돌아와 벽화를 구경하고 있자니 픽업 차량이 도착했다. 차 안에는 이미 백인 남성 한 명이 타고 있었고, 우리가 탄 다음에도 다음 동네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태웠다. 우리는 보통 여행지에서 늦게 자고 일찍 나오는 타입이라, 이 시간에 경비행기 타러 나온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경비행장에 도착해보니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비행 스케줄이 밀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렇게들 부지런할 일인가요, 한국인들이여


 항공사 부스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무슨 여행 박람회라도 온 것처럼 사방이 온통 부스였다. 우리가 예약한 'Air Majoro'를 찾기 위해 하나하나 훑으며 한 바퀴를 돌았는데, 하고 많은 부스 중 유독 작은 데가 우리가 예약한 항공사였다. 다행히 경비행기 티켓은 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체중계가 왜 여기서 나와?

 내 이럴 줄 알고 아침을 안 먹었지!라고 하기에는 한 끼 굶어서 될 몸무게가 아니었는데, 이 절차를 포기하면 나스카 라인은 안녕이다. 예마야 선생님, 왜 이 얘기는 안 해주신 건가요 - 저녁까지 굶었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거라 그런가 -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들이라며 순순히 응하긴 했다만 탑승 전의 설렘에 뻘쭘함이 한 스푼 섞이고 말았다. 경비행기는 균형을 잡기 위해 체중대로 좌석 배치를 해야 한다고 한다. 정녕 페루에 다시 온다면 고산병, 트래킹 때문이 아니라 경비행기 때문에 체중 관리를 해야겠다.   


 우여곡절 끝에 수속을 마치고 대기석으로 돌아와 차례를 기다리는데, 역시 리마의 호르헤 차베스 공항에서 받은 신속 정확한 서비스는 리마 한정인 것이다. 여기도 별다른 안내 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크루즈 델 수르, 택시에서 연달아 골탕을 먹고 한층 예민해진 뇽은 넋 놓고 있다가 비행기 순서를 어느 틈에 강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좌불안석이었다.

 하필이면 비행기조차 우리가 예약한 게 유독 크기가 작고 낡아서 뇽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예전에 뉴스에서 봤던 경비행기 사고가 이 순간 쓸데없이 뇌리를 스치고 말이다.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보려면 무난한 방법으로는 안 되는 건가. 하여간 부정적인 사고로는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들이 막상 이름 부르니까 숨도 안 쉬고 뛰어나갔다.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비행기 앞에 아까 픽업차량에 같이 탔던 세 명이 나와있었다.


나스카 라인 투어, 시작합니다!


 탑승 전 항공사 직원의 제안으로 미리 기념사진을 찍었다. 차림새가 남루하여 찍지 말까도 싶었지만 이 순간이 또 언제 올까 싶어 비행기 앞에 둘이 나란히 섰다. 지금 봐도 사진 속 내 모습이 영 촌스럽긴 하지만 안 찍었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다. 날씨가 좋았고, 비록 체중계 앞에 부끄러운 몸일망정 지금보다 4살이나 어렸으며, 생애 첫 경비행기 체험을 앞두고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드디어  탑승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오늘의 관람을 주도하실 조종사들의 머리 위에 달린 안내판이었다. '팁 환영합니다'를 정성스럽게도 5개 국어로 써 놓았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등판한 한글의 위엄이라니, 지갑이 열리는 느낌이 든다. 일단 체험 성공 후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항공사에서 받은 팸플릿을 펼쳤다. 지금부터 관람할 나스카 라인의 그림들이 순서대로 나와있었고, 조종사들은 현란한 곡예비행과 함께 실시간 중계를 시작했다.


 나는 정말 눈썰미가 평균 이하로 나쁜 사람이라, 모범답안을 쥐어주고 실시간 중계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첫 번째 그림, 고래를 찾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옆 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하는 짓이 답답했던지 잠시 자신의 관람까지 포기하고 내 자리로 넘어와서 창밖을 열심히 가리켰는데, 정말 그 장소를 벗어나기 직전에 간신히 봤다. 6인승 비행기에서도 이렇게 헤맸는데 이것보다 더 큰 비행기를 탔으면 비행시간 내내 그림 끄트머리만 보다 끝났겠다는 생각이 든다. 90달러의 가치가 찬란히 빛나는 아름다운 비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보일락말락 고래

 

 비록 고래는 거의 놓칠 위기에서 겨우 봤지만, 한번 그렇게 보고 나니 다음 그림부터는 대충 어디쯤 있겠구나 싶은 감이 오면서 찾기가 수월해졌다. 그리고 정말 경비행기 만만세인 것이, 이러다 땅에 처박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림에 바짝 다가간다. 망원경의 도움이 없이 그림이 너무 선명하게 잘 보여서 신기한 와중에, 어릴 적 멀미 때문에 모든 자동차 여행을 누워서 다녔던 내가 베스트 컨디션으로 감상을 하고 있는 사실도 놀라웠다. 역시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나에게 고래를 보여주려 노력한 친절한 동행인은 식사를 하고 온 건지, 체질적으로 멀미에 취약했는지 고래 다음부터 구토하느라 거의 감상을 못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얼마나 아까울까. 언젠가 하늘길이 열리는 날 나스카 라인을 보리라 계획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돈은 많이 쓰고, 위장은 텅텅 비운 채 가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키미테까지 붙여주면 금상첨화죠.


 지상화의 실물 느낌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흑판에 분필로 그린 그림 같았는데, 그 규모가 너무 크고, 너무 섬세하고, 너무 선명했다. 나 같은 똥손은 기름종이에 대고 그리라고 해도 삐뚤빼뚤 할 텐데 그 큰 그림이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반듯하다. 심지어 선 하나로 단숨에 그린 듯 깔끔하다. 그 상태 그대로 긴 세월 동안 남아있다는 사실이 가장 신기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 그림을 그린 존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래의 생명체에게 자신의 작품이 우연히 발견될 거라는 걸 짐작했을까. 인간의 삶이 너무나 짧고, 내가 끝내 알지 못하고 갈 지구의 비밀은 이렇게 많겠다는 생각에 아쉬우면서도 이 순간을 허락해 준 모든 것들 - 부모님, 우주의 기운, 명절 연휴, 통장 잔고, 예마야 아저씨, Air Majoro 등 - 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정교함과 귀여움을 다 가지셨다!


 그림 하나하나가 만화처럼 귀엽게 생겼는데, 나는 원숭이와 거미 같은 둥글둥글한 그림이 마음에 들었고, 뇽은 콘도르나 벌새처럼 선이 복잡한데 대칭을 이루고 있는 섬세한 그림을 좋아했다. 사실 좋아하는 그림 고르기는 나중 문제고, 마지막 그림까지 찾았을 때 뇽은 울 것처럼 웃으며 기뻐했다. 별생각 없이 따라온 내 눈에도 대단해 보였는데, 어릴 때부터의 꿈꿔 온 것을 실물로 목격한 뇽의 기분은 어땠을까. 소중한 사람의 뜻깊은 순간에 함께했다는 사실까지 완벽했던 나스카 라인 투어였다.


다 좋았는데, 정말 진심으로 조종사님들 감사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우리끼리 흥분해서 떠드느라 팁을 전달하는 걸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팁까지 내고 나왔어야 완벽한 엔딩일 텐데 말이다. 안 되겠다. 꼭 다시 보러 가야겠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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