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밤에 도착했지만 할 건 해야 한다.
리마에서 나스카까지 가는 버스는 이카를 지나는 경로인데,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이카는 저녁 6시쯤 지나고, 나스카엔 저녁 8시쯤 도착하는 것이었으나 언제나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무너뜨려주는 페루의 도로 사정은 예상과 아주 달랐다. 우리의 목적지인 나스카에 도착하기 2시간 전, 잠시 정차했던 이카에서 이미 깜깜한 한밤중 상태. 충분해 보이지 않는 주황색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택시 호객들이 하차 승객들에게 몰리던 장면, 옅은 가로등 색깔이 기억에 너무나 선명해 사진으로 찍어놓은 줄 알았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나오질 않는다. 물론, 찍었어도 흔들렸거나 안 나왔을 것이 뻔할 정도로 어두웠지만. 거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정말 어지간히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밤에 도착할 줄은 몰랐으니까.
저녁 9시를 넘긴 시각. 정말 오랜 세월을 염원했던 나스카에 도착했지만 새까만 하늘 아래 별은커녕 그 어떤 것도 뵈는 것이 없는 작은 터미널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내리는 사람까지 별로 없어 배낭을 찾는 것은 아주 수월했지만 숙소까지 가는 길이 막막했다. 숙소 예약을 했던 어플을 켜고 주소를 확인해서 구글맵에 주소를 찍어보니 그렇게까지 멀진 않았지만 (도보 10~15분) 이 한밤중에 가로등도 별로 없는 곳에서 그곳까지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렇게 막막한 겁쟁이 둘이서 터미널 로비를 막 빠져나가려던 순간 여러 명의 성인(중년쯤) 남성들이 해당 터미널에서 내린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시켜왔다. 나는 이카처럼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라고 생각했고 혹시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갈까 고민하던 차에 어떤 남자분이 정말 1의 고민도 없이 우리에게로 와 "예마야."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내가 예약한 숙소의 이름이 예마야였다! 게다가 그들은 우리가 내린 그 순간부터 꽤 큰 목소리로 예약자인 내 이름을 불렀는데 영어식 철자 J가 스페인어에선 ㅎ과 비슷한 소리로 발음되는 관계로 내가 못 알아듣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가 퇴실할 때까지 사장님은 내 이름의 J를 ㅎ으로 발음하셨다 -
페루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동아시아 여성 관광객 - 대부분의 여행객은 백인, 페루에서 만난 동아시아 관광객의 90%는 한국인이었다 - 인 우리를 보고 사장님이 한달음에 달려와 '우리 손님!' 하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고 우리는 사장님 동행분 - 친구로 추정 - 의 생각보다 좋은 픽업 승용차를 타고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비를 몇 배를 불러도 반드시 타고 가리라 마음먹었던 그 밤에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승용차를 이용하는데도 사장님은 우리의 짐을 모두 들어 트렁크에 넣어주시고 - 숙소에선 3층까지 짐을 올려주시고 - 중간중간 걱정하지 말라며 말을 걸어주셨다. 그리고 숙소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차창 밖은 지나가는 사람도, 불 켜진 상점도 거의 없는 살벌한 야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서울 촌년 둘이 무슨 깡으로 이 시간에 나스카에 떨어진 것인가. 의지할 데라곤 영어를 잘하시는 친절한 주인아저씨와 친구분의 미소뿐이었다.
저렴한 숙소(약 19,000원) 였기에 방 컨디션은 그냥저냥 아주 나쁘진 않은 수준. 숙소의 컨디션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내가 왜 이런 저렴하고 작은 숙소를 빌렸을까. 그렇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 숙소의 사장님은 영어를 잘하셨다!!
나스카 라인을 보기 위해 경비행기를 예약하려면 에스파뇰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미 거기서 강한 '망함'을 느꼈는데 이대로 주저 앉아 '망함'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 페루 여행 전 포털사이트를 통해 나스카 경비행기를 예약하는 갖가지 방법을 찾아보았는데 어떤 부부가 바로 이 '예마야' 숙소 아저씨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잘 예약하셨다는 후기를 보게 되었다. 게다가 예약 어플에도 '호스트 영어 가능'이라고 쓰여있었으니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다. 그리하여 예마야 와의 인연 시작.
우리의 기대대로 숙소 아저씨는 웬만한 여행 가이드 뺨을 후려칠 만큼 설명을 잘해주셨다. 짐을 풀고 1층 카운터로 내려와 nazca lines flight tour 예약을 혹시 도와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니 'Why not?'이라는 유쾌한 제스처와 함께 설명을 시작하셨다. 나스카 라인을 항공에서 볼 수 있는 경비행기는 3종류가 있는데 - 팸플릿도 꺼내서 보여주심 - 제일 작은 비행기인 6인승은 양쪽 모두 잘 보이는데 가격이 비싸고, 제일 큰 12인승은 비교적 저렴하지만 3열 좌석이라 가운데 앉으면 잘 못 본다며 어떤 것이 좋은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고, 내 평생의 소원이었던 만큼 이럴 땐 돈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잘 보이는 걸 타자고 합의한 우리는 작은 비행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보여주신 가격은 100달러... 공항에 가서 예약하면 7~80달러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데 일단 지금은 밤이고, 우리는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싶고, 에스파뇰을 조금도 할 줄 몰랐으니 100달러를 온전히 내야 할 판. 지금으로써도 비싼 가격 앞에 잠시 망설이고 있으니 아저씨는 '너네 혹시 학생이니? 학생이면 10달러가 할인된단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30대에 양심 없이 학생이라고 말할 수 없기는커녕 1초의 고민도 없이 '그렇습니다. 학생입니다.'라고 말하는 나를 보고 아저씨는 방긋 웃으며 90달러 영수증과 예약표를 끊어주셨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 7시 반에 숙소 앞에서 픽업차량(무료)이 올 테니 잘 자두라고. 그리고 아침을 먹고 비행기 타면 다 토한다는 경고까지 해주셨다.
예약까지 마치자 시간은 10시를 넘겼고 아침 일찍 경비행기를 타려면 일찍 자야 했음에도 우린 '아침을 먹을 수 없으니 지금 저녁을 먹자'는 비약적인 논리로 사장님께 조심스레 동네 치안을 여쭤보았다. 밤에 안전하냐고. 나스카 시민-동네 주민이자 성인 남성인 사장님은 '전혀' 문제가 없고 마음껏 돌아다녀도 된다고, 정말 아주 안전하다고 했는데 숙소를 빠져나와 좌우로 보이는 골목길은 흉흉한 어둠, 그리고 아주 작은 피자집뿐이었다.
동네 피자집 스타일로 따듯한 노란색 조명 아래 피자 사진들이 붙어있고 카운터 위에 걸린 TV에선 영화 킹 아서가 스페인어 자막 판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메뉴판엔 다행히 영어가 적혀 있어서 평소에 즐겨먹던 페퍼로니 피자와, 페루에 오면 꼭 먹어보라고 많은 사람들이 권했던 페루 칵테일 '피스코 사워'를 시켜 기분 좋은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숙소 사장님께 잔돈을 바꾸고자 구매했던 잉카 콜라까지 함께 마시니 이 어찌 만족스럽지 않다 할 수 있을까.
괜찮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카운터에 있던 직원들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뭐라고 작게 속삭이고 킥킥거렸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도 그 묘해지는 기운에 뭔가 언짢아졌지만 왜 웃느냐는 말을 스페인어로 할 줄도 모르고 뭐라고 설명해도 알아들을 리 없으니 그냥 돌아섰다. 가게에서 나오던 알은 '내 꼬락서니가 구려서 그런가(30시간의 비행이 끝난 첫날이라 머리를 48시간 동안 감지 못함)' 라며 투덜거렸는데, 어쩌면 내 영어 발음이 웃겼거나 에스파뇰을 단 하나도 구사할 줄 모르는 우리가 웃겼을 수도.
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와 우리나라가 아닌 모든 나라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배드 버그'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여행용 시트를 깔고 침낭을 설치하고 이불을 덮는등 오만 깔끔은 다 떨고 알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기록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만하니까 귓가를 울리는 '위잉~'... 모기다! 급하게 배낭을 열어 미리 준비해둔 모기퇴치 팔찌를 착용. 생각보다 괜찮은 효과에 우린 모기 팔찌 신봉자가 되어 마지막 날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기로 했다.
<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