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수도 리마, 그중에서도 치안면에서 가장 완벽하고 세련된 동네라는 '미라플로레스' 그곳에 방문하긴 했지만 사실 우리는 거기서 뭘 하겠다는 계획은 별로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반드시 보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절벽 위의 쇼핑몰!
서있는 곳은 쇼핑몰인데 발아래는 절벽
보통 절벽이라고 하면 장엄하거나, 아니면 흉흉한 느낌인데 이 미라플로레스의 절벽은 높이는 아찔했지만 그 아래로 광활한 바다 - 남태평양- 가 보이고, 우리나라의 유명 쇼핑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쇼핑몰까지 있어 낯선 환경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관광장소로 아주 탁월했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산을 끼고 도시가 형성된 것을 신기해하듯이 우리도 이곳에서 태평양과 절벽을 끼고 발전된 도시의 이질적이지만 독특한 조화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멋진 자연경관이라면 빠지지 않고 있어야 할 '리마 맛집'도 그곳에 있었으나 전 회차에 기술한 대로 우리는 아직도 기내식의 후폭풍과 겨우 반반 나눠먹은 라루라 샌드위치가 뱃속에 고스란히 자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차피 리마는 이후 올 것이니 마지막 날 다시 오자는 다짐과 셀피를 남기고 돌아섰다.
다 지난 마당에 하는 말이지만 기회는 언제나 그렇게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날씨까지 도왔던 멋진 레스토랑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유명 쇼핑몰에 입점되어있는 브랜드는 전 세계 어딜 가나 비슷했고 심지어 그곳은 페루보단 유럽의 어느 곳 같은 풍경이라(현지인보단 백인이 많은 느낌) 우리는 대충 시간을 때우고 터미널로 이동하기로 했다. 오늘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해가지기 전 나스카에 도착하는 것!
리마에서 나스카까지는 버스로 8시간이나 걸리지만 나스카에 큰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공항이 없어 반드시 시내버스로 가야만 했는데 미라플로레스에서 크루즈 델 수르 버스터미널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터라 우리는 '괜히 사서 고생하지 말자'며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그리고 우버를 부를까, 아무거나 잡을까 고민하는 사이 배낭을 메고 길바닥에서 서성이는 관광객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호객 왕 페루의 택시기사님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페루에서 호객을 당할 때는 일단 그 사람이 적법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가격이 얼마인지 미리 합의하고 따라가야 한다는 조언을 꽤 여러 번 들었던 나는 나에게 'Amiga~(친구-여성)'를 외치며 다가오는 그의 목에 걸린 라이선스부터 확인했다. 그것을 눈치챈 기사는 자기가 얼마나 적법한 택시기사인지 자신의 명찰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여러 번 어필했고 어딜 가는지 아주 빠르게 3번 정도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목적지를 안 그분은 바로 80 솔(약 27,000원)로 흥정을 시작했는데, 페루 택시비가 저렴한 수준은 이미 알고 있었고, 구글 맵 기준 20분이면 가는 거리를 한국 택시비보다 비싼 값을 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영어로 흥정을 시도했다. 영어를 못한다면서 80 솔을 우기던 그분은 내가 '아 그럼 됐다. 다른 택시 잡을게' 이런 식으로 나오자 가격을 점점 떨어뜨려 50 솔(약 16,000원)을 불렀다. 여행책에서 권장하는 적합한 가격은 아니었지만(25~30 솔 권장),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지쳐있기도 했고 자신이 가진 거스름돈까지 보여주는 기사의 열정에 우리는 탑승을 선택했다. 몇 번이고 달러가 아닌 '페루 솔'을 확인하고, 한 사람당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과 짐을 모두 포함한 가격임을 서너 번 정도 확인까지 마쳤으니 별일 없겠지.
짧은 영어로 이것저것 사소한 대화를 하며 터미널에 도착. 그리고 정확히 18분 만에 도착한 도착지에서 50 솔이 50달러(55,000원)가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분명 SOL로 흥정해놓고 Dollar 였다고 우기는 기사. 환율상 거의 3배가 차이 나는데 미쳤다고 그 돈에 왔을까! 나는 이 사태에 대해 의사를 분명히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에 '니가 50 솔이라고 했잖아!'라고 했더니 자신은 50달러를 말했단다. 내가 '50 솔'이라고 서너 번 확인했는데 무슨 말이냐, 우리는 달러가 없다고 나오니 갑자기 작아지며 달러가 조금도 없냐고 다시 물어본다. 때마침 안전을 위해 보유하고 있는 돈을 이곳저곳에 분산 보관 중이었던 나는 개중 잔돈을 모아둔 돈 봉투를 열어 달러가 없음을 어필했지만 10달러 이하의 잔돈이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20달러 (22,000원)을 털리게 된다. 5달러짜리만 있었어도 15달러로 냈을 텐데!!! 진정, 달러마저도 잔돈이 생명인 이곳이 페루구나.
잉카의 상징이 그려진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 카운터
거대한 태양 로고가 시선을 강탈하는 크루즈 델 수르 터미널. 사방천지엔 오직 스페인어만 적혀있고(영어도 없다), 온라인으로 예매한 나 같은 사람을 위한 티켓 출력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카운터로 가 오직 에스파뇰만 하는 직원과 오직 영어만 하는 내가 용호상박으로 붙어있으니 영어를 할 줄 아는 다른 직원의 개입으로 '이 프린트물은 티켓으로 대체된다'는 대답을 얻고 돌아왔다. 곱게 잘 보관하고 있던 그 프린트 물이 티켓인 건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 버스가 없을까?!
우리가 예매한 나스카행 버스는 2시 30분 차. 앞서 2시 20분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바로 뒤에 줄을 서니 버스 출발시간이 2시 40분이라는 팻말이 앞에 섰다. 대체 우리 버스는 어디로 증발해버렸는가. 심지어 맨 앞자리 좌석에 앉겠다고 돈을 더 주고 예매했는데 나의 좌석은 대체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다시 비영어권 직원과 실랑이 끝에 알아낸 것은 '곧 들어올 2시 40분 차가 우리가 타야 할 버스'라는 것이었다. 좌석도 그대로냐 물어보니 그녀는 내 프린트물을 들고 잠시 기다려보라 하고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탑승을 안내해야 할 직원이 없어지자 불안한 것은 이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10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우리가 7달러나 더 지불하고 예약한 앞좌석이 아닌 2층의 정말 '아무 데나 남는 자리'였다. 잔액 환불도, 바뀐 스케줄에 대한 사과의 말도 없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오히려 미소를 싹 거둔 얼굴로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라는 식의 대응이 나와 더 이상 따지기를 포기했다. 페루 리마 공항에 떨어진 지 6시간 만에 터진일치곤 기구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떠올려 보자면 이 정도는 약과였다.
페루 사람들은 모두가 정말로 친절했지만,
그곳의 시스템은 단 하나도 예상 가능한 것이 없었다.
택시나 버스가 대수냐, 하다 못해 비행기 까지도!! (추후 기술)
그리고 우려했던 또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으니 페루 여행 경험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자신의 짐은 본인이 지키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배낭이었으니 따로 유의할 점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크루즈 델 수르는 우리나라의 고속버스들 보다 조금 더 고급진(?) 시스템으로 마치 비행기에 탑승하듯 보딩체크를 하고, 노트북 가방보다 큰 가방은 수화물로 맡겨야 하고, 버스 탑승전엔 개인 가방검사도 해야 했다. 웬만하면 짐을 맡기고 싶지 않았는데 시스템이 그렇다면 외지인이 별 수 없지.
수화물 코너에 쌓인 짐들, 우리 배낭도 섞여있다
하지만 그러고도 우리는, 특히 알은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고 몇 시간이 흘러 중간 정차 시간이 되자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려 짐칸이 열리는 것을 보더니 짐을 보고 오겠다며 버스 1층으로 내려갔다. 나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수화물 표도 나눠주고 뭐 별일 있겠냐 싶었는데 알의 혈육이 '반드시 짐을 지키라'는 경고가 하도 무서워 하차인원들에 섞여 나가 보겠다는 것이다. 알이 잠깐 나갔다 온 사이 나는 또 잠이 들었고 후일 물어보니 수화물 표를 보고 직원들이 짐을 내려주었다며 혼자 의심의 레이저를 쏘고 있기 민망했다는 것이다.
크루즈 델 수르의 서비스 수준은 비행기 서비스에서 모티브를 따왔는지 자리에 앉아 조금 가다 보면 '꼬미다'(밥)을 먹을 거냐 물어보고는 가벼운 치킨 도시락을 나눠준다. 마치 뉴욕에서 먹은 할랄푸드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맛은 그럭저럭.
30분도 걸리지 않아 대도시를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나라에서 고속도로를 타면 끊임없이 보이는 산맥만큼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보인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 그 자체인듯한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은 사막의 모습은 TV나 사막으로 볼 때와 다르게 심심하게만 보이진 않았다. 다만, 자연환경 보호의 차원인지 터널이 전혀 없는 고속도로라 구불구불한 자연친화적인 도로를 따라 달리느라 예상시간보다도 훨씬 더 오래 걸렸을 뿐.
터널도, 가로수도 없이 왕복 2차선 고속도로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겠다는 계획이 어그러져 숙소 예약을 했던 어플 메시지를 통해 호스트에게 도착 예정시간 1시간 전부터 늦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호스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걱정 말고 오라며 따듯한 답변을 남겨주었다. 결국 나스카엔 저녁 9시에나 겨우 도착했고, 새까만 하늘 아래 보이는 것은 오로지 생각보다 더 아주 훨씬 많이 작은 터미널의 조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