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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Aug 03. 2021

꼬레아나? 안녕하세요!

낯선 도시, 친근한 사람들. 리마와의 첫 만남

 페루 여행 첫날 관광의 필수 코스로 정해놓은 것은 <꽃보다 청춘> 멤버들이 갔던 리마의 '라 루차 샌드위치'와 '메르까도(시장)' , '세비체' 맛집 방문, 미라플로레스의 절벽 쇼핑몰 구경까지 총 네 가지였다. 어째 먹는 일정이 반 이상인데, 이 계획을 짤 때 우리는 기내식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게 틀림없다. 비행기 두 대에서 주는 기내식을 단 한 번도 사양하지 않았고, 남기지도 않는 바람에 위장이 과부하 상태였다. 와중에 공항버스에 앉은 채로 리마 시내까지 미동도 없이 왔던 것.

 아무리 꿈속에서도 먹을 것을 찾는 나지만 먹잠만 20시간 넘게 반복한 다음 곧장 샌드위치를 산뜻하게 맞이할 자신은 없었다. 다만 환전을 마쳤으니 돈 쓸 자신은 있다! 소화를 도울 겸, 화장실도 한번 들를 겸 인근 스타벅스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분명 스타벅스의 덕후는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 스타벅스가 자꾸 내가 가게끔 덫을 놓는 것 같다. 일단 여행지에서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인근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건물인 데다 유 아 히어 컬렉션이 있고, 경주 스타벅스처럼 지역 느낌을 살린 예쁜 건물을 각 나라에 최소 하나씩은 만들어놨다 - 페루에서는 쿠스코 스타벅스가 그런 곳 - 심지어 페루 스타벅스에는 이 나라에서만 파는 과일 음료가 있다니, 아무리 배가 불러도 이건 꼭 맛을 봐야겠다!


평범한 매장 안에 비범한 음료, 치리모야 프라푸치노


 그 비장의 음료 이름은 '치리모야 프라푸치노'였다. '치리모야'에 대해 어디서는 세계 3대 과일이라고 칭송하고, 당도가 엄청 높다고 해서 페루 음식에 대해 찾아볼 때 위시리스트에 넣었던 품목 중 하나였다. 쿠스코 스타벅스에 있다고 해서 며칠 뒤에 먹어 볼 예정이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만나게 되었다. 과연 그 맛은 어떠한가?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아는 과일 느낌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일들은 대부분 수분이 많은 상큼 달콤한 맛인데, 그런 과일 맛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어색했. 과일 자체가 아니라 가공 음료라 그런지 대만의 석가처럼 폭발적인 단맛도 아니었다 - 석가는 내 생애 최고로 달았던 독보적 과일 - 혹자는 이 음료가 밀키스나 캔디바 느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제품 맛과 딱 일치하는 건 아니고 밀크소다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 있어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뒷맛은 깔끔했다. 다만 초콜릿 소스는 안 뿌리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치리모야 프라푸치노로 위장 재정비가 되었는지, 라 루차 샌드위치도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본격 도보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 지도와 구글맵 대신 살아있는 내비게이션, 뇽을 앞세워  샌드위치 집까지 걸어갔다. 여담이지만 신께서 뇽과 나를 만드실 때 뇽에게는 길 찾기 - 혹은 이미지 기억 - 능력을 과도하게 쏟는 바람에 체력을 챙겨주지 못했고, 나에게는 반대로 주신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여행은 늘 '지혜롭지만 힘없는' 노인 뇽과 그의 충실한 반려견, 나의 조합으로 움직인다. 머릿속에서 길 찾기 시뮬레이션을 마친 뇽이 앞장서고, 나는 짐을 진 채 열심히 따라가고. 같이 다녀오긴 했는데 어떤 루트로 간 건지 나는 전혀 모른다.

 요약하자면 Double Tree 호텔 근처 스타벅스에서 플라잉 독 게스트하우스 1층 샌드위치 가게까지는 도보로 충분히 갈 만한 거리는 맞는데 어떻게 갔는지는 설명을 못 하겠다는 것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순간 이동한 것처럼 눈앞에 라 루차가 나타났을 뿐.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책이나 영상으로만 접했던 그것'을 실제로 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라 루차 샌드위치는 내가 <꽃청춘>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가게다. TV에서 세 사람이 꾀죄죄한 몰골로 샌드위치를 나눠먹으며 맛있다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페루에 간다면 저걸 먹어보고 싶다'라고 생각만 했는데 눈앞에 실물이 나타나니 꿈을 꾸는 듯 얼떨떨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여행이 시작되었다'라는 실감이 났다. 그건 그렇고, 처음 보는 건 일단 찍어야 한다!


<꽃청춘>의 성지, 라 루차 샌드위치

 

 가게 안에 직원들이 꽤 있으니 '최대한 사람 얼굴은 덜 보이고 간판은 잘 나오면서 분위기 있게'라는 목표를 가지고 약간 떨어져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그 바쁜 와중에 카메라를 캐치한 직원이 활짝 웃으며 손가락 V를 치켜들어 흠칫 놀랐다. 못 찍게 하기는커녕, 즐기고 있어! 외국인을 향한 긍정 에너지가 뿜뿜하는 걸 보니 음식을 주문할 용기가 생긴다. 이 집에 대해서 검색했을 때 어느 블로그에서 영문 메뉴판이 있다고 쓰여 있었던 기억이 있어 그거부터 요청해봤는데,

 그런 건 없단다... 블로거는 다른 지점에 가셨는지 모르겠으나, 2017년 9월 말 기준 플라잉 독 게스트하우스 건물의 라 루차에는 영문 메뉴판 없음 확인. 에스빠뇰 까막눈 관광객 둘은 당황했으나, 전략을 바꿔 가장 유명한 메뉴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라 루차 샌드위치'를 추천해주셨는데, 가게 이름과 똑같아서 왠지 믿음이 갔다. 서로 짧은 영어회화로 얼버무리는 와중에도 뇽은 매운 걸 빼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종이로 꽁꽁 싸서 먹기 좋게 반으로 자른 샌드위치를 건네받는데, 뜻밖에도 "감사합니다"라는 명백한 한국어 인사가 훅 들어왔다. 영문 메뉴판은 없는데 인사는 한국말로 하기 있음? 대체 이곳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간 걸까. <꽃청춘>의 파급 효과 이 정도인가! 비록 메뉴판에서는 막혔으나 한국인에 대해 낯가림이 요만큼도 없는 직원들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꽃밭과 꽃색 건물, 케네디파크

 

 샌드위치는 무릇 파릇파릇한 나무가 있는 공원 배경으로 먹어야 제 맛인데, 때마침 근처에 케네디 파크가 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회색 하늘과 대비되는 쨍한 색감의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고, 공원을 둘러싼 낮은 건물들도 꽃밭과 어울리는 노랑, 자줏빛으로 예쁘게 칠해놓았다. 잔디밭 옆 원형 무대 계단에 걸터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데 배가 부른 상태인데도 맛있었다. 나중에 샌드위치 구성이 뭐였는지 찾아보니 소고기 안심, 양파, 치즈가 메인이었는데 먹을 당시에는 고기와 아보카도 맛이 가장 많이 느껴졌다. 매운맛 대신 아보카도를 듬뿍 넣어준 건가 싶다. 세상 행복한 얼굴로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는데, 지나가던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꼬레아나?"
 꼬레아나는 맞습니다만, 왜요?
 "안녕하세요!"
 아니, 이 아저씨는 또 언제 한국말을 배웠대? 그 말을 써먹고 싶어서 굳이 이 쪽으로 걸어와서 국적을 확인한 건가?  아저씨는 미션을 완수해서 개운하다는 얼굴로 껄껄 웃으며 가던 길을 갔고, 우리는 입을 쩍 벌린 채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천지 외국어 공부 안 하는 사람 우리밖에 없나 봐! 우리는 페루 사람들이 낯선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거리에서 만나는 아시안의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확신이 있는 모양이다. 인생 통틀어 가장 낯선 언어, 사람들, 문화를 만나러 온 우리를 친근하게 반겨주는 모습이 고마우면서 동시에 모험심은 반감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학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황에서 실전 에스빠뇰 회화를 맞닥뜨리는 건 두렵다. 모험심 같은 건 잠시 넣어두자.


꽃처럼 예쁜 고양이 씨


 샌드위치 맛을 충분히 음미한 뒤 공원 구경에 나섰다. 케네디 파크에는 꽃보다 많은 것이 있었으니, 각양각색의 무늬를 자랑하는 고양이들이다. 시의 정책인 건지 주민들이 챙기는 건지 모르겠으나 곳곳에 고양이 밥그릇이 꽤 많이 있었고, 녀석들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이 제 할 일을 했다. 심지어 어떤 고양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인형처럼 자고 있어서, 뇽이 시체로 오해하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살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어 보기 좋았다.

 파란색 몸에 금색 귀, 코뚜레를 달고 있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소 동상을 발견하고는 뭔지 모르지만 예뻐서 함께 셀피를 찍었다. 총 세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V만 하기에는 심심해서 한 장의 사진은 소의 콧구멍을 쑤시는 포즈를 취했다. 뒤늦게 찾아보니 그 소가 복의 상징이란다. 맙소사, 내 손가락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로또가 안 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아 슬프다.

 

 비록 복덩이 소 님을 몰라 뵙고 무엄한 짓을 했지만 인근 Parroquia La Virgen Milagrosa 성당에서는 나만의 여행 의식을 성실히 수행했다.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여행지에서 늘 수행하는 의식을 소개하자면, 제일 처음 만나는 종교시설 - 사찰, 성당, 교회 어디든 상관없다 - 에 들어가서 소액의 헌금을 하는 것이다. 처음 이 의식을 수행할 때는 가족과 지인의 건강, 복을 기원했는데 언제부턴가 여행기간 동안의 행복을 빌고 있다. 지금까지 날씨 때문에 여행을 망쳐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꽤 믿을만한 의식으로, 이 때는 마추픽추를 잘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 아니라고 하지만, 하필이면 TV에서 안개가 잔뜩 껴서 못 보게 될 뻔한 위기를 보여주는 바람에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당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조각상들의 옷 색깔이나 장신구가 화려한 것이었다. 페루 말고는 남미의 다른 국가를 가보지 않아 이게 페루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당뿐 아니라 거리의 기념품샵에서 본 나무 조각상도 쨍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이 너무 예뻤다. 불상의 생김새도 인도와 우리나라가 다른 것처럼, 같은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믿음이 샘솟는 아름다움


 첫날의 필수 코스 네 가지 중 하나만 끝낸 이 시점에서, 세비체 맛집과 메르까도 중 다음 행선지를 선택해야 한다. 샌드위치까지는 맛있게 넘겼지만 더 이상은 못 받겠다는 위장의 신호를 받아, 메르까도에 가기로 했다. <꽃청춘> 멤버들이 그곳에서 지갑을 사고 과일주스도 마셨는데, 해외여행을 가면 늘 동전이 남지 않게 꼼꼼하게 계산하는 뇽에게는 지갑이 필요하고 과일 덕후인 나에게는 주스가 소중하므로 여기는 꼭 가야 했다. 케네디 파크에서 메르까도까지는 도보로 이동 가능하며, 지도는 뇽의 머릿속에 있다. 역시나 아무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비상한 능력을 선보였다.   


 메르까도는 규모가 큰 재래시장이었다. 입구 쪽에 노점도 크게 열려있었는데,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구니에 소복하게 계란을 담아 진열해놓았고 <톰과 제리>의 구멍 숭숭 치즈를 큼지막하게 썰어 쌓아 놓았다. 과일 가게에는 빨강, 노랑, 초록 바나나가 간판을 나무 삼아 주렁주렁 열렸고,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상자에 빈틈없이 담겨있었다. 상인들의 미적 감각이 보통이 아니다. 과일, 야채의 색깔 조합이 어찌 이리 그림처럼 예쁠까. 여행지가 아니라 동네였다면 다 업어가고 싶게 생겼다.  


색채의 향연,  메르까도의 과일가게

 

 볼거리가 이렇게 풍부한 반면, 단점이라면 재래시장이다 보니 통행로가 좁아 배낭을 지고 돌아다니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역시 나에게 절약을 강요하는 애물단지 배낭. 우리의 첫날 숙소는 나스카에 있었기 때문에 리마 관광 내내 거북이로 살아야 할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계획한 건 사고 싶어서 그 좁은 틈을 헤치고 꾸역꾸역 돌아다니는데, 지갑 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몸이 힘들면 포기가 빨라지기 마련. 우리는 지갑은 다른 기념품샵에서도 팔 테니 나중으로 미루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게에서 과일 하나만 사자고 합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빨간 바나나를 샀어야 했는데 무거워 보여서 그랬는지 우리 동네 마트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생김새의 포도를 선택했다. 그런데, 계산에서 막힐 줄이야.
 에스빠뇰에 능한 사람이라면 흥정을 해서 더 저렴하게 살 수도 있었겠으나, 우리는 할인은 고사하고 '포도를 이만큼만 주세요'라는 의사 표현부터 쉽지 않았다. 메르까도의 상인은 라 루차와는 달리 영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차라리 바나나를 골랐다면 쉬웠을 것 같은데 포도는 개별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원하는 을 표현하기가 막막했다. 결제를 할 때 조차도 서로 종이에 써야 할 정도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세계 어디서든 바디랭귀지가 통한다지만 여행지에서 보다 풍부한 경험을 누리려면 언어는 필수인 것을, 게으름 피웠다가 이렇게 혼이 나고 만다. 메르까도 구경은 아쉽지만 포도 구매로 막을 내렸다.


 다시 케네디 파크 방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기념품샵을 발견했다. 밖에서 봤을 때 비싸 보이는 데다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좀 부담스러웠지만, 메르까도에서 못 찾은 지갑을 사고 싶어서 발을 들였다. 별생각 없이 들어왔는데 우리가 그토록 찾던 동전지갑뿐 아니라 위시리스트에 있는 모든 기념품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야마 인형, 컵, 코스터까지 죄다 내 취향이라니. 여행 첫날이 아니었다면, 특히 배낭이 없었다면 파산을 맞이할 각이다.


기념품, 이렇게 예뻐도 되나요


 지름신을 배낭으로 찍어 누르고 간신히 지갑 하나만 집어 들었는데, 9 솔이란다. 나중에 쿠스코에서 선물용으로 샀던 지갑들이 3~5 솔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비싼 편이었지만, 마감이 깔끔하고 튼튼해 보이는 것이 값어치가 있어 보여서 순순히 결제했다. 이때만 해도 동전 생김새를 잘 구분하지 못했던 터라, 갖고 있는 동전 몇 개를 손바닥에 쏟아 보여주었더니 주인이 알아서 동전을 집어가서는 거스름돈을 주었다.

 그런데 분명히 아까 가격이 9 솔이라고 들었는데 거슬러 받은 돈으로 계산해보면 6 솔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공부를 안 했기로서니 6과 9는 발음이 전혀 다른 숫자인데 어떻게 된 일일까? 자체적으로 할인을 해 준건지 우리가 내민 동전을 잘못 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유창한 에스빠뇰이 가능했다면 메르까도에서 그 고생을 안 했겠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조용히 나오기로 했다.


 이제 이곳에서의 일정은 세비체 맛집을 제외하면 미라플로레스 절벽뿐인데, 시간이 꽤 남은 편이라 설렁설렁 거리 구경을 하며 걸어갔다. 나스카, 쿠스코에서는 한국인들을 꽤 많이 봤는데 여기서는 타이밍이 안 맞았는지, 거리를 활보하는 아시안은 우리밖에 없어서 지나가는 택시나 봉고들이 꼭 한 번씩 호객을 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이렇게 호객 소리를 들으면 '아, 우리는 스쳐봐도 눈에 띄는 관광객이다'라는 자각이 생겨 배낭과 크로스백 끈을 바짝 쥐었다. 이 동네는 치안이 좋은 편이고 대낮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었을지 모르겠으나, 낯선 동네를 여자 둘이서 다닐 때는 항상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경계해야 탈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사진을 찍거나 가방 정리를 할 때 둘 중 한 명은 늘 주변을 살펴보곤 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다 잉카 콜라도 만나고 말이죠.


잉카는 콜라도 황금이지


 페루에서 코카콜라보다 잘 나간다는 마성의 음료! 맛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지만 페루에 와서 이걸 안 마셔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방 정리를 하려고 앉았던 벤치 앞에 때마침 슈퍼가 있어 잉카 콜라와 첫 만남을 가졌다. 황금색 캔 안에 게토레이보다 노오란 색깔의 음료가 들어있었는데, 생각보다 탄산은 적고 단맛이 진하다. 탄산의 톡 쏘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걸로 갈증 해소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뇽이 바로 그 탄산 중독자이기 때문에 한두 모금만 마시고 나에게 넘겼다. 정말 독특하게 달다. 인생 음료로 꼽을 만큼 맛있었다거나 구매대행을 검색하게 되는 맛까지는 아니지만, 페루 여행의 추억을 떠올릴 때 이걸 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평가다.

 

 거리 구경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전선을 타고 길을 건너는 다람쥐였다. 이곳에서 본 가로수들은 온통 야자수나 선인장이었는데 어디에 집을 지은 건지, 공원도 아닌 건널목에서 다람쥐를 봤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케네디 파크의 고양이들처럼, 이 다람쥐도 도심의 일상에 무심하게 섞여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은행에 붙어있는 예금 광고 그림이 눈에 띄었는데, 돼지 두 마리한테 각각 페루의 니트 모자와 미국의 톱햇을 씌워놓은 모습이 귀여웠다. '어피치' 카드를 갖고 싶어서 체크카드를 새로 신청했던 나 같은 사람이 혹할 만한 광고로, 대체 그 귀염둥이들이 뭘 광고했을까 궁금해서 나중에 파파고를 돌려보았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당좌 예금'이라는데, 순식간에 흥미가 뚝 떨어진다. 이 동네에도 나처럼 숫자 얘기라면 눈 감고 귀 막는 사람들이 있어 이런 그림을 걸어놨나 싶다.


거리에서 만난 귀염둥이들 /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벰보스

 

 페루의 국민 햄버거라는 '벰보스 햄버거'도 지나가는 길에 마주쳤다. 지금 들어가도 될지 위장의 눈치를 살폈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메뉴판만 염탐했다. 햄버거 속에 감자튀김이 장작더미처럼 쌓여있는 비주얼이 범상치 않았다. 이것도 여기서밖에 못 먹어볼 맛인데, 위장아 어떻게 안 되겠니... 나는 왜 기내식에서 페이스 조절을 하지 못했는가. 포장이라도 해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해봤지만 아직 여행기간이 9일이나 남았는데 설마 그 안에 한 번을 못 갈까 싶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아슬아슬하게, 아찔하게 멋진 미라플로레스 절벽

 

 '절벽'과 '쇼핑몰'이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단어의 조합이 실현되는 곳, 드디어 리마에서의 최종 목적지 미라플로레스 절벽에 도착했다. 바다와 도로, 절벽과 쇼핑몰이 하나의 프레임에 쏙 들어오는 신기한 풍경이다. 보통 절벽이라고 하면 내 머릿속에 연상되는 이미지는 '실족사' 같은 흉흉한 것뿐이었는데 그 안에 생활공간을 집어넣으니 아무렇지 않게 전망 좋은 핫플레이스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외국인들이 산을 끼고 도시가 형성된 모습을 신기하게 보듯, 나 역시도 도시와 자연의 이질적이지만 독특한 조화가 흥미로웠다. 그 안에는 맛집으로 소문난,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도 있었다. 휴양지의 낭만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열흘간의 일정 중 마지막 날 다시 리마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으므로, 여행의 마무리를 여기서 하자고 약속한 후 나스카행 버스를 타러 이동했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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