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는 어딘가 어설프지만 필요한 것은 다 있는 리마 국제공항
9월 30일 저녁 8시 인천공항 대한항공 탑승 - 12시간 뒤 LA공항 도착
9월 30일 낮 2시 35분 LA 공항 (시차로 인해 현지시간을 역행하는 위엄)
9월 30일 저녁 9시 30분 LA공항 라탐 항공 탑승
10월 1일 아침 8시 페루 리마, 호르헤 차베스 공항 도착!
현지시간 기준으로 작성된 위의 내용을 보면 마치 9시 30일 저녁 8시에 출발해서 10월 1일 아침 8시에 도착했으니 12시간 만에 온 것 같지만 시차로 인한 착시일 뿐... 실제 소요시간은 26시간. 한국에서의 보딩체크 시간까지 합치면 못해도 30시간은 필요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편해 입었던 청바지가 장시간의 비행으로 무릎이 튀어나올 정도로 장장 30시간을 날아온 곳에 드디어! 미국 공항에서도 볼 수 있는 한글이 1도 보이지 않는, 한글도 한문도 일본어도 없는, 진짜 외국이다!
미국에서 꽤나 Welcome 하지 않은 경험을 한 탓에 나는 '외국인에게 친절한 나라는 끽해봐야 한국이나 일본 정도 일 것이다'라는 생각에 착륙 전 세관신고서도 입국신고서도 꼼꼼히 작성했다. 그 어떤 것도 꼬투리 잡히지 않으리라! 그러나 정작 처음 만난 페루 사람(입국신고서 직원)은 그저 "Welcome to Peru"라는 말과 맑은 미소로 여권에 도장을 찍고 환영의 손인사로 모든 것을 대신했으니... 그래! 이게 Welcome이지! 근데, 세관신고서와 입국신고서는 왜 안 받는 거죠???
수화물을 찾을 필요도 없던 우리는 수화물을 기다리는 소규모의 인파를 뒤로하고 입국 게이트로 나섰다. 게이트를 나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부스들. 공항리무진 버스를 예약할 수 있는 회사와, 택시회사, 페루 여행 가이드를 해준다는 여행사 등등 총 6~7개의 회사들이 과학실 책상 1개 사이즈의 부스로 자리를 잡고 우리를 보며 밝은 미소로 환영의 인사를 보내줬는데, 일단 우리는 그 작은 규모에 놀랐고 - 인천공항이 너무 큰 탓이다 - 작은 규모만큼 선택지가 많지 않은 데다 그들의 호객도 적당한 수준이라 - 버스는 여기예요, 택시는 여기예요 수준 -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계획했던 공항리무진 버스회사의 부스로 향했다.
"¡Hola!"
배워뒀던 스페인어 발사!
하지만 '올라!' 그 한마디에서 느껴지는 어눌한 억양과 발음에서 '에스파뇰 할 줄 모름'이 느껴졌는지 바로 영어 안내가 돌아온다. 역시 에스빠뇰을 무리해서 준비할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했지만 공항을 떠난 뒤 3시간도 안돼서 그 에스빠뇰에 무너지게 되니, 이는 다음 회차에 기술하기로 한다.
친절한 공항버스 직원들은 영어로 된 지도를 꺼내 주며 어디를 가느냐 물었고 우리는 사전에 계획해둔 미라플로레스(신도시, 치안안전)를 가고 싶다고 하니 지도에서 우리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 표시와 지역 이름부터 체크해주었다. 거기에 그 근처 방문하면 좋은 인근 관광지까지 표시해주고 다시 공항으로 오는 버스 시간표까지 안내를 해주더니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며 안내 직원까지 하나 붙여주는 것이 아닌가! 아니 15 솔(약 4,500원)에 서비스 너무 훌륭한 거 아닌가요.
드디어 만나게 된 리마의 하늘은 그날이 유난히 그런 건지 (이후 리마에 있을 때마다 그러긴 했지만) 회색 하늘이었고, 페루라면 당연히 먹어야 한다는 '잉카 콜라'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우리가 본 첫 번째 광고판은 실물의 5만 배는 되어 보이는 '코카콜라' 광고판이었다. 아직은 그렇게까지 낯설지 않은 풍경을 보고 올라탄 버스는 의외로 와이파이도 빵빵하게 터졌고 깨끗한 커버에, 기분 좋은 문구까지 쓰여있어 인터넷에서 보고 들은 수많은 남미에 대한 편견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데 좋은 것은 좋겠지!
리마 시내로 가는 길.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리마에 대한 인상은 먼저 개가 많았고, 건물이 낮았고, KFC와 피자헛이 많았으며, 담벼락 위에 방범시설이 많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 거주지역을 지나면서는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담벼락 위에 시멘트를 발라 유리조각을 꽂아놓거나 전기 철조망을 잔뜩 쳐놓았다는 것이 그곳의 치안이 어느 정도 인지 미루어 짐작 가능케했다. 분명 우리는 치안이 그나마 안전하다는 지역으로 가는데도 이런 풍경을 보게 되다니... 역시 여행책에서 '위험하다' '가지 말아라' 하는 지역은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다. 특히,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 것!
미라플로레스 지역의 케네디 파크와 가까운 정류장으로 안내받은 Double Tree Hotel 앞에서 내린 우리들은 일단 100% 미화 달러로 보유 중인 현금을 페루 솔로 환전을 해야 했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아는 모든 여행정보 도서, 인터넷, 경험자들은 은행에 가는 것보다 길거리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게 낫다며 - 환율이 좋다고 - 추천했다. 이 점이 바로 윗 문단과 문맥상 오류가 있어 보이는데, 치안이 안 좋을 것 같은 도시인데 길바닥에서 돈거래를 한다는 점이 매우 그렇다.
길 건너 스타벅스는 보이니 그야말로 소비욕구가 하늘을 찔렀는데, 앞서 다녀온 모든 이들의 후기대로 '환전소 직원' 표시의 빨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시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이제야 비로소 '길거리 환전'을 시도해봐야 한다.
누가 봐도 관광객인 커다란 배낭을 멘 두 명의 동양인 여성이 가까이 다가서자 그들은 예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Exchange?' 하고 물어봤다. 일정 금액의 달러를 페루 솔로 교환하고 싶다고 하면, 그들은 손에 든 안내서를 통해 현시세를 알려주고 니가 원하는 달러는 이만큼의 솔로 바뀐다며 만국 공통어인 '계산기'를 들어서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 길에서 - 바로 거래가 시작되는데 치안이 안 좋다는 건 다 거짓말인지 우리가 환전을 하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실은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한 다발의 페루 솔을 내민 그들은 우리에게 건네야 줄 페루 지폐의 코너에 작은 도장을 쭉 찍어줬는데 하는 말로는 '이게 위조화폐가 아니라는 증거다. 문제가 되는 돈이면 우리가 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라는 식의 설명을 했다. 근데... 그것도 그냥 가짜면 그만이지 않나... 하고 의심해봤자 이미 환전 완료. 듣기로는 그 환전소 직원 표시의 빨간 조끼는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물론, 이마저도 최근엔 분위기가 바뀌어 길거리 환전 사기 사건이 자주 신고되어 시내 은행이나 호텔에서 환전하라고 권유하고 있으니 코로나가 끝난 이후 다시 방문하게 될 경우 반드시 참고해야 되겠다.
당시 기준으로 100달러는 약 380 솔 정도 되었고 환전소는 작은 동전들까지 싹 모아서 깔끔하게 제시한 달러만큼의 페루 솔을 만들어주었는데 달러가 나간 자리에 3.8배를 차지하여 꽤나 두둑해진 페루 솔을 지갑에 구겨 넣으며 불안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진짜 여행을 시작하게 됐다.
*페루의 관광지에서는 달러로 거래가 가능한 곳이 많아서 꼭 전부 환전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바꾸기로 하고 시간 날 때마다 나누어서 있는 돈의 절반만 페루 솔로 환전했는데 결국 달러가 남아서 다시 한국으로 들고 오기까지 했을 정도로 페루 물가는 생각보다 더 저렴했다.
<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