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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뇽알 Jul 27. 2021

남의 나라 들어가기 참 어렵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페루까지: 먹고, 꿀잠 자고, 검문받으라.

 그동안 대형 항공사는 아시아나만 이용했었고 대한항공 탑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자리에 차곡차곡 놓여있는 기내품을 바라보며, '담요랑 슬리퍼는 아시아나가 더 좋고 치약은 대한항공이 더 귀엽다'라는 브리핑을 마치고 착석. 우리가 예매한 자리는 창가랑 가운데였던 터라, 복도 쪽 승객을 깨우지 않기 위해 화장실 사용을 최대한 자제했던 것 말고는 만족스러운 비행이었다.


 일단 장거리 비행은 밥이 자주 나온다는 사실이 가장 좋다. 페루 여행을 다녀온 후 지인들에게 비행시간만 20시간이 넘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답답해서 어떻게 견디냐, 아무리 볼 게 많아도 비행시간 때문에 도저히 못 가겠다'라는 반응이었는데, 나로서는 '밥 잘 주고 틈틈이 영화 보다가 자면 되는데 못 견딜 일이 무엇이냐'라는 생각이다. 굳이 걱정할 게 있다면 터뷸런스 아닐까.

 첫 식사는 중식 해물 누들과 소고기 스튜로 골랐는데 둘 다 뇽과 내 입맛에는 딱이었다. 물론 생각해보면 나는 기내식 맛없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만족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행을 시작하는 날인데 웬만해서는 다 맛있게 느끼지 않았을까? 영화 목록에 <스파이더맨 - 홈 커밍>이 있는 것도 좋았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재밌었던 영화라 두 시간이 순삭 되겠다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영화 감상 말고 꿀잠으로 사라진 두 시간... 눈을 떠 보니 피터 파커는 없었다.  


두근두근 첫 번째 기내식, 그리고 스치듯 안녕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와 만나자마자 이별한 이후로도 다른 영화를 선택해 놓고 또 계속 잤다. 장거리 비행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여행 전날 밤에 집안을 뒤집느라 잠을 안 자는 방법을 추천한다. 비좁은 이코노미석에 14시간 동안 갇혀있다는 느낌을 실감할 새도 없이, 자다 보면 밥때가 오고 밥 먹고 나면 다시 잠이 올 것이다.

 분명 창밖이 온통 컴컴할 때 탑승해서 밥 한 번 먹고 몇 시간 자지 않았는데, 다시 밥때가 되어 눈을 떴을 땐 창밖이 환해져 있었고 '아침식사' 메뉴를 고르라는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하루가 사라진 느낌이 이상하면서도 '다른 대륙'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좋았다. 아침식사는 흰 죽과 계란 요리 중 선택. 먹고 바로 자는 바람에 약간 더부룩해진 속에는 흰 죽을 고르는 게 이치에 맞겠으나, 컨디션과 상관없이 그저 맛있는 게 좋은 우리는 둘 다 계란 요리를 골랐다. 확실히 소화는 안 되는 것 같은데 맛있었다. 먹었으니 다시 영화 틀고, 자야지.


 결국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것 없이 먹잠을 반복하다 어느새 LAX 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할 때가 되자 갑자기 기내에 'California Dreamin(mamas and papas)'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뇽과 나는 대한항공의 센스에 감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LA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이벤트로 이보다 적절한 게 있을까. 예전에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런 음악도 환영 메시지도 없이 입국심사 인파에 정신없이 섞여 들었던 터라, 우리에겐 꽤나 큰 재미와 감동이었다.

 무겁기 그지없는 배낭이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으니, 모두가 수하물을 찾으러 직진하는 이 순간 우리만 느긋하게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던 LAX 공항의 화장실 거울 앞에서 14시간 만에 마주한 내 얼굴은 먹잠을 반복하며 누적된 개기름으로 빛나고 있었다. 뒤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 참 다행인 몰골이다. 크로스백에 미리 넣어둔 클렌징 티슈를 꺼내 얼굴 재부팅을 마치고 느릿느릿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입국심사 줄 서는 동안 진을 다 뺐던 뉴욕의 JFK와 달리, LAX 공항은 우리나라처럼 자동입국심사 기계가 있어서 좋았다. 여권 스캔, 지문 입력, 얼굴 스캔을 하는 기계였는데, 얼굴을 그냥 스캔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어서 영수증에 지이잉 출력하는 게 아닌가! 세상에 화장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 개인정보 털리는 건 안중에도 없었던 나 - 생각보다 사진이 잘 나와서 제출 안 하고 소장하고 싶다고 낄낄거렸는데, 뇽이 뽑을 차례가 되자 갑자기 영수증에 불길한 X 표시가 찍혔다. 이게 뭐람, 설마 또 검문이야? 우리나라에서 받았는데 또?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X 나온 녀석들 따로 줄 서란다. 나는 X 표시가 뜬 건 아니었지만 일행은 같이 서 있으라고 해서 X의 물결에 함께 휩쓸렸다. 생각보다 X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라, 인종 구분 없이 다양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셀프 체크인에서 망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가? 그렇다면 기계를 왜 그 따위로 만들어서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냐! 빨리 수속을 마친 보람도 없이, 우리는 다시 줄 서기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기계가 있어서 좋았다는 말, 취소다.


몇 시간 있다 떠날 곳인데, 들어오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하염없이 줄을 서는 와중에 'welcome to LA'라는 문구를 보니 약이 올랐다. 이놈의 동네는 웰컴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으면서 잘도 저런 걸 붙여놨다고 우리끼리 흉을 봤다. 배낭을 추켜올리다 못해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파올 때, 드디어 우리의 차례가 왔다. 그런데 둘이 일행이니까 같이 가라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나더러 따로 가서 심사를 받으란다. 그나마도 말이 너무 빨라서 나는 못 알아듣고 멍하니 있다가 뇽의 손짓에 따라 주춤주춤 옆으로 빠졌다.


 해외여행을 몇 번 가보지도 않았지만, 그동안 입국 심사를 혼자 받아본 적은 없었는데,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혼자 들어가려니 긴장이 되었다. 어디서 왔냐, 여기 왜 왔냐 달랑 두 가지 물어봤는데도 빨리 대답을 못 했다. 특히 국적 질문에 습관적으로 Korea라고 했다가 직원 표정이 이상해져서 South Korea로 급하게 정정했더니 똑바로 얘기하라며 구박받았다. 그래도 난 X가 안 떠서 그런지 거기까지만 물어보고 좋은 하루 보내라며 풀어줬는데 - 이렇게 시작했는데 좋은 하루겠니? - 나중에 만난 뇽은 영혼이 탈탈 털리도록 질문 폭탄을 받았다고 했다. X를 받은 게 나였으면 우리 여행은 LA에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welcome to LA' 문구 당장 떼지 못할까!


 겨우 심사대를 탈출한 뒤, 비행기 탑승할 때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동네 구경이라도 갔다 와야 하나 싶었다. 공항을 완전히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와도 되는 건지는 안내문이 없어 보안요원에게 물어보니 LA에서 처음 보는 인간적인 미소를 지으며 얼마든지 그러란다. 신나게 출구로 달려갔지만 막상 나와서 지도를 살펴보니 거리가 죄다 멀었고, 사전에 교통편을 알아봐 놓지 않아서 돌발 상황이 생기면 비행기 탑승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우리랑 같은 경로로 페루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중 산타모니카 해변에 들렀다가 페루에 갔다는 후기도 있었지만, 우리는 쫄보니까 모험은 사양한다. 짐만 재정비하고 다시 출국장으로 돌아왔다.


 여행지에서 구경과 식사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연코 쇼핑이라 하겠다. 일단 LA에 도착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하기로 계획했던 일이 있었으니, 입국 심사 때문에 기억 저편으로 밀릴 뻔한 '스타벅스 You are here collection 찾기'였다. 스스로 스타벅스의 덕후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You are here collection'의 노예는 맞는 것 같다. 내가 다녀왔던 도시의 주요 건축물·풍경과 이름을 앙증맞게 새긴 이 컵 만한 기념품이 또 있을까. 뉴욕 여행 때 처음 보고 반해서 네 개나 구입한 뒤로는 이제 어느 나라를 가도 이건 꼭 사야겠다며 수집병이 도져버렸다.

 

캘리포니아 한 조각 가져가세요

 

 오 세상에, 여긴 LA와 캘리포니아 컵이 별도로 있다니! 조금 전까지 배낭 무겁다는 말을 숨 쉬듯이 뱉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짐을 추가해버렸다. 너무 예쁜데 너무 무겁다. 지인 선물용으로는 도저히 못 사겠다. 페루 여행을 하는 동안 느낀 배낭의 장점은 수하물 대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 단점은 쇼핑의 의욕이 확 떨어진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짐을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지만 집에서 나올 때 이미 가방 무게가 7.4킬로그램이었다. 돌아올 때는 얼마나 무게가 늘어나 있을까. 최소 리마, 쿠스코 컵이 추가될 예정이니, 페루에 도착하기 전에 캐리어를 사는 게 나을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페루는 배낭여행'이라는, 여행 초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데다 일부러 산 배낭 값이 아까워서라도 꾸역꾸역 버티기로 했다. 결제하기 전에 추가로 오렌지카운티 컵을 발견했지만 못 본 척했다. 어차피 오렌지카운티는 아예 땅을 밟아보지도 못했으니, 기념할 가치도 없었다.


 다음으로 여행 기분을 더하기 위해 이국적인 음식을 찾아 먹어보기로 했다. 뉴욕에서 맛있게 먹었던 '판다 익스프레스'가 눈에 띄었지만 새로운 걸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패스. 처음 보는 가게에 들어가서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골랐다. 외관은 평범한 카페처럼 생겨서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주문 담당 서버가 별도로 있고 팁을 받는 곳이었다. 예상외의 지출이 당황스러웠지만 LA에서 유일하게 먹는 한 끼 식사니까 받아들이기로 했다. 치킨 아보카도 샌드위치가 맛있었고, 샐러드는 기대했던 더운 야채가 아니었지만 드레싱은 마음에 들었다.


 정직한 '치킨 아보카도' 샌드위치

 

 LA 방문 기념 컵을 샀고, 공항 표시가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쳤으니 적당히 기분 냈고, 이제 비행기만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비행기 타러 가는 길에 기념품샵이 있네? 이름도 무려 ' The Hollywood Reporter'라니, 배낭이 아무리 무거워도 이건 못 참지!

 하지만 기대를 잔뜩 품고 들어가서 목도한 'Hollywood Reporter'의 기념품은 너무나 성의 없었다. '할리우드'라면서 정작 영화 관련 아이템은 보이지도 않고 LA 다저스 기념품 조금과 스노우볼, 열쇠고리가 대부분이었다. 한참 동안 가게를 뒤적거리다 그나마 'Los Angeles' 글씨가 새겨진 병따개가 깔끔하게 생겨서 이거라도 사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까부터 오스카상을 갖고 싶다고 중얼거리던 뇽이 기어이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도금 찬란한 오스카 자석이여! 역시 오스카가 있어야 할리우드다.


LA는 역시 오스카


 입국심사 마쳤고, 밥 먹고 쇼핑까지 했으니 이제 비행기 뜰 때까지 딩가딩가 하면 되겠지. 159번 게이트에 미리 가서 배낭을 내려놓고, 공항에서 득템한 기념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애초에 여행 준비를 할 때 짐 챙기는 것, 간염 예방 접종 외에는 준비랄 게 없이 백지상태로 출발한 나와 달리, 혼자서 모든 교통수단과 숙박업소, 유적지의 위치와 시간을 파악하느라 예민함이 극에 달한 뇽은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비행 정보 스크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비행기 목록이 몇 번 뜨고 사라지는 걸 지켜보더니, 뇽은 아무래도 이 안에 우리 비행기가 안 뜨는 것 같다며 알아보고 올 테니 여기서 짐과 함께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충실한 반려견처럼 '기다려'를 받들어 159번 게이트 근처 의자에서 배낭과 함께 남아있었다.


 10~15분 정도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혼자 잘 놀고 있었다. 주변 구경을 하고, 오스카와 LA 병따개 인증샷도 찍고, 배낭을 한번 더 단단히 여미면서 그럭저럭 있을 만했다. 그런데 30분이 다 되어가도록 뇽이 나타나지 않아 슬슬 불안해졌다. 뇽이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은 일생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길을 몰라서 못 오는 것 같진 않고 아마도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매우 궁금했으나, 나야말로 여기서 움직였다간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자타공인 방향치라 움직이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여기는 국내가 아니어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미션이 될 수 있으니, 그냥 내가 제일 잘하는 멍 때리기에 돌입하기로 했다.


 내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기 전에 지친 얼굴로 나타난 뇽은 거두절미하고 다른 게이트로 가야 한다며 앞장섰다. 가면서 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정말 복잡하고도 충격적이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예매한 비행기는 '란칠레' 항공의 것인데, 예매했던 그 비행기는 사라져서 칠레로 가는 사람들이 타는 비행기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근에 란칠레 항공 직원이 없어 LAX 공항 직원을 찾아 겨우 물어보고 알아낸 사실이라고 한다.  

 비행기가 바뀌었는데 안내 방송 하나 나오지 않는 공항의 매정함이란. 아니, 토익 시험 볼 땐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이 있더만 실생활에서는 왜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거야! 뇽이 힘들게 알아낸 게이트에 도착했지만, 거기에서도 란칠레 항공 직원은 보이지 않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비행기가 바뀌었다면서 과연 우리 좌석은 유효한 걸까? 혹시라도 다른 사람과 중복으로 예약된 건 아닌가?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며 침울하게 기다렸다. 뇽이 인터넷으로 급하게 찾아보니 작년에 란칠레랑 어느 항공이랑 합쳐서 최종적으로 '라탐' 항공이 되었다는데, 그렇다면 왜 우리가 티켓 예매할 때는 라탐이 아니고 란칠레 항공이었느냔 말이다. 역시 그 티켓, 문제가 있는 건가?

  

끝났다고 말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티켓 확인

 

 한참 뒤에 등장한 라탐 항공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준 뒤, 여기가 너네 비행기 탑승 게이트 맞고 티켓도 문제없다고 확답을 받고 나서야 한 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남의 똥줄 타는 것도 모르고 세상 느긋한 얼굴로 대답하더니만, 뇽이 "우리 말고도 이 사실을 몰라서 159번 게이트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제보하자, 그는 그제야 다른 직원에게 159번 게이트로 가서 사람들을 인솔하도록 지시했다. 와, 말 안 했으면 다 함께 159번 게이트의 망부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작부터 우리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란칠레, 아니 라탐 항공. 내 자리 멀쩡한가, 얘네 과연 밥은 줄까 의심하며 - 그 와중에 밥부터 생각하는 나 - 탑승했는데, 자리가 좀 좁긴 하지만 담요랑 베개가 따로 있었고 화장실도 매우 깨끗해서 심란했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영화도 대한항공과 비교할 수 없게 많았는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도로 숙면 모드로 전환된 나는 <데드풀>마저도 정들기 전에 이별했다.


 둘 다 밥 나올 때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는데, 승무원이 메뉴 설명 중 치킨 요리가 맵다고 했다. 치킨은 좋아하지만 매운 건 못 먹는 뇽이 망설이다가 많이 맵냐고 물어보니 대뜸 "맵지만 도전해볼 만하다. 너 어느 나라 사람이니?"라고 물었다. 갑자기 국적은 왜 물어보지? 뇽이 'South Korea'라고 대답하자, 승무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럼 너는 먹을 수 있어."라며 적극 추천했다. '한국인이라면 가능한 매운맛'이 궁금해서 그 치킨 요리와 치즈 라비올리를 주문했더니 꿀조합이었다. 특히 치킨은 정말 요만큼도 안 매운 토마토소스를 써서, '한국인의 매운맛' 강도가 얼마나 센지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인이라면 도전 가능한 매운맛' 치킨 요리

 

기내식에서 아쉬웠던 점이라고는 내가 메인 요리에 홀린 나머지, 기내식 음료 중 그 유명한 페루의 '쿠스께냐' 맥주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성급하게 커피를 주문했다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음료 구성까지 완벽했다는 이야기. 어차피 현지에 가서 먹어볼 수 있고, 비행기에서 괜히 음주를 했다가 배탈 날 수도 있으니 아쉬움을 털고 커피를 기다렸다.

 라탐 항공의 커피는 약간 산미가 있었지만 진해서 좋았다. 아직 리마 근처도 못 갔는데 이것이 남미의 커피인가, 라며 혼자 흡족해했다. 여기에 키켓 초콜릿까지 곁들여 주는 센스라니. 분명 탑승 전에 그렇게 의심스러웠던 라탐 항공이 점점 좋아지려고 한다. 나란 승객, 참 쉬운 사람...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뒤, 모처럼 바로 잠들지 않고 비행경로 화면을 보며 뇽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옆에 앉은 한국인 아주머니가 쿠스코에 가냐면서 말을 걸어오셨다. 그분은 부부 동반 패키지여행을 가시는 중인데, 쿠스코부터 가셔서 바로 트래킹을 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혹시라도 고산병 때문에 쿠스코 관광을 잘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연세도 많은 분이 도착하자마자 쿠스코 트래킹이라니!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을까 싶었다.

 내가 페루 여행을 준비할 때 읽은 책에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고산병 에피소드였단 말이다. 젊고 건강한 여자 둘이서 쿠스코에 도착하자마자 호텔방에 산소통과 함께 누운 채 30분간 일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4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실제로 쿠스코에 가서 만난 관광객들 중 고산병에 시달리는 사람보다 멀쩡한 사람의 비율이 더 많긴 했지만, 만약 당첨(?)된다면 만만하게 만한 병은 아니었다. 여하튼, 우리의 비행기는 많았던 LA를 벗어나 최종 목적지, 리마에 점점 가까워졌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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