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부터 알차게 달리려면 숙면을 취해야 하거늘, 새벽 두 시 반에 잠자리에 들어 다섯 시 반에 눈을 뜨고 말았다. 너무 설레어서 잠을 설쳤다거나, 여행책을 한번 더 들여다보느라 그랬다는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바닥 청소를 하고 냉장고 음식을 털고 끝없이 쌓이는 설거지를 하느라 말도 안 되게 하루가 사라졌다.
예전에 엄마가 그렇게 놀러 가기 전날 집안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여행 가서 뭘 입고 먹을 건지는 안중에도 없이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며 놀렸던 과거의 나는 혼나야 한다 - 근데 엄마도 친구분이 놀러 가기 전날 밤 김치를 담갔다는 일화를 듣고, 당신의 행적은 까맣게 잊은 채 친구를 나무랐다고 한다 - 열흘 동안 집을 비울 생각을 하니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곰팡이 가득한 냉장고 반찬, 파리 날리는 싱크대, 먼지 자욱한 방바닥이 나를 맞이하길 원치 않았다. 기어이 냉장고에서 김치를 제외한 각종 반찬들과 채소를 다 꺼내서는, 아보카도 덮밥을 국그릇에 고봉으로 퍼먹고, 야채실 과일도 싹 깎아 먹었더니 새벽 두 시 반까지 배가 꺼지지 않았다. 그러고도 남은 채소를 모아, 뇽은 피클을 담갔다. 무려 페루에 가기 전날인데 우리 마음을 지배한 것은 마추픽추도 나스카 라인도 아닌 매일 보는 집구석이었던 것이다.
가사 지옥에서 벗어난 뒤에도 배낭을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긴 여행에 캐리어가 아닌 배낭을 챙긴 건 처음이어서, 공간은 좁아졌는데 챙길 물건은 많아 고민이었다. 일단 옷은 얇은 티셔츠 둘, 청바지 두 벌, 카디건과 경량 패딩, 잠옷을 한 벌씩만 넣었다. 보통 여행 갈 때 그래도 상의는 매일 갈아입는다는 생각으로 옷을 준비하는데, 배낭에 넣으려니 저렇게만 챙겨도 포화 상태였다. 그리고 평소 챙겨본 적 없는 아이템 - 모기 팔찌, 깔라만시 비누, 휴대용 변기 커버, 종이비누, 사파리 모자, 침낭 등 - 을 추가로 넣었다. '페루'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해 뇽이 대비한 것이 각종 교통수단 티켓과 구글맵이었다면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황열병 모기와 베드 버그 퇴치였다 -고산병도 대비하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약을 처방해주지 않았다 -
볼리비아는 안 가고 페루만 간다고 얘기했더니 병원에서 간염 접종만 해 주는 바람에, 모기에게 한 방도 물리지 않는 것을 목표로 각종 무기를 챙겼다. 모기 팔찌를 팔다리에 다 채운다고 네 개나 샀고, 인터넷에서 모기가 깔라만시 냄새를 싫어한다는 내용의 글을 읽고 나서 지인에게 선물 받은 깔라만시 비누를 처음 꺼냈다 - 현지에서 뿌리는 모기약까지 샀더니 완벽했다 - 베드 버그도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며, 멀쩡한 숙소들을 예약했음에도 침낭을 굳이 챙겼다. 혹시 모르니 수건도 하나 넣고, 화장품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카메라랑 배터리, 충전기도 무조건이지. 대체 이 중에 필요 없는 물건이 뭐란 말인가! 열흘 동안 지고 다닐 등딱지는 점점 몸집을 불려 갔다.
모든 준비를 끝낸 시간이 새벽 2시 반. 새벽 5시 알람을 맞췄으나 결국 30분 늦잠을 잤으며, 예상시간보다 1시간 늦은 8시 10분에 출발했다. 사실 밤 비행기를 탈 거라서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명절 연휴 때는 원래 체크인 시간도 평소보다 몇 배씩 걸릴 것이고 환전도 해야 하고 공항 구경도 해야 한다며 일찍 나서기로 했다.
뇽의 짐만 이만큼.
씻고 나와서 소파 위에 나란히 놓인 배낭과 보조가방을 보니 벌써 어깨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기분만이 아니었다. 그 등딱지를 메고 집에서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오는 동안 벌써 어깨가 내려앉았다. 다들 배낭여행 가기 전에 따로 벌크업을 하는 건가? 이런 걸 어떻게 몇 주, 몇 달씩 메고 다니는 거지? 이것은 가방이 아닌 로망의 무게라는, 자기 최면을 걸며 버스만 애타게 기다렸다. 다행히 제법 빈자리가 있는 버스가 나타났다.
세 시간밖에 못 자고 나온 터라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었다가, 공항 도착하기 직전에 뒷좌석 아기가 목놓아 우는 바람에 간신히 눈을 떴다. 아직 비행기 타지도 않았는데 너는 벌써 울면 이따가는 어떡하니,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해 보았다. 벌써 뻐근한 내 어깨나 걱정할 일이지.
예상대로 인천공항은 여행객으로 바글바글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용무를 해결하고 남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생전 처음 본 셀프 체크인 기계 앞에 당당히 섰다. 셀프 체크인 기계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그런지 여기는 유독 한산했고, 우리는 역시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인재들이라고 자부하며 열심히 화면을 넘겼다.
한참 순조롭게 지나가다 '우편번호'라는 막다른 골목을 맞이한 뇽과 나. 급하게 숙소 주소를 검색해봤지만 거기엔 우편번호가 나와있지 않았고, 근처에 있었던 직원에게 탈출 방법을 물어봐도 "우편번호요?"하고 반문하는 것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이럴 땐 별다른 수가 없다. 본인의 지식과 판단력, 운을 믿고 덤비는 수밖에. 뇽이 체크인 기계를 살펴보다가 용케 <모르면 99999를 쳐라>라는 지령이 쓰여 있는 걸 발견하고 그대로 실행해서 넘어갔다.
이제 다 잘 되겠거니 했더니만, 이놈의 신식 기계가 내 티켓만 토해내고 뇽의 것은 모르는 척했다. 같은 걸 눌렀는데 뭘 잘못했냐고! 앞에서 길길이 뛰어봐야 기계는 말이 없다. 결국 우리는 아날로그로의 퇴행을 인정하고 헬프데스크로 향했다.
셀프 체크인실패로 의기소침해진 우리는 줄도 잘못 설까 봐 직원에게 헬프데스크 위치를 물어봤는데, 이 날은 공항 직원과 인연이 좋지 않은 날이었던 듯싶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수하물 줄로 보내버렸다. 문제가 생긴 고객의 90%는 수하물이다,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리 여행객이 몰리는 날이라지만 무슨 헬프데스크 줄이 이렇게 긴가 싶어 포기하고 나와보니, 전혀 상관없는 위치에 헬프데스크가 있었다.
헬프데스크 쪽은 대기자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직원이 만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요즘 리마 가시는 분 많더라구요"라고 말을 붙였다. 하지만 오로지 티켓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있었던 우리는 함께 웃지 못하고 컴퓨터만 노려보았다. 우주의 기운이 통했던지 이번에는 별 탈 없이 출력되었다. 이때만 해도 여기까지가 액땜인 줄 알았다.
티켓 하나 뽑는데 너무 오래 걸린 바람에, 그동안 메고 있었던 등딱지를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페루 현지에서 이걸 어떻게 갖고 다닐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탑승 전까지 배낭과 이별하기로 했다. 수하물 보관소에 짐짝을 내려놓고 나니 이제야 좀 여행 가는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도 가볍게, 휴대폰 로밍 신청을 하러 가자!
내 어깨에 광명을 찾아 준 수하물 보관소
SKT랑 LGT는 사이좋게 붙어있는데 KT만 떨어져 있어서 꽤 걸어야 했다. 그런데 힘들게 도착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지난번 여행 때 신청한 로밍 해지를 깜박하고 안 하는 바람에, 새로 신청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둘 다 그걸 미리 확인해 볼 생각을 안 했는지, 이래서 친구인가 보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봤는데, 페루 갔다 와서도 로밍 해지를 안 한 것 같다. 저런.
다음 순서는 환전. 예전에는 주로 홍대 근처의 '트래블 디포'라는 환전소에서 환전했었는데, 이번엔 홍대까지 갈 시간이 나지 않아 국민은행 인터넷 뱅킹에서 신청, 공항에서 수령하기로 했다. 막판에 환전한 것 치고는 환율이 꽤 괜찮은 편이라 안도했다. 일단 여기서 달러로 환전한 뒤, 페루에 가서 다시 환전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잔돈으로 받으려고 했더니 은행 직원이 재환전 안 하실 거냐며, 큰돈으로 바꿔야 이득이라고 조언하는 것이었다. 은행 직원이 나보다는 잘 알겠지 싶어서 순순히 말을 들었다만, 100달러짜리만 7장을 쥐고 있자니 괜히 찝찝했다. 리마의 길 한복판에서 만날 환전상들이 부디 별말 없이 바꿔주기만을 빌며.
체크인에서 환전까지 끝내고 나니, 분명 아침식사를 과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금방 꺼져버렸다. 아직 점심 때는 아니어서 밥을 제대로 먹기는 그렇고, KFC에서 간단하게 세트 1개만 사서 간식으로 나눠먹기로 했다. 타워버거박스를 주문했는데, 2인분 같은 1인분의 자태로 나타나서 움찔했다. 물론 다 먹었지만.
이제 시간도 꽤 남았고 급하게 해야 할 일은 끝냈으니, 카페에 앉아서 여행지도 정리나 좀 하자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인근 카페들이 전부 테이크아웃 전용이었다. 탑승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면세점 쇼핑뿐이란 말인가? 주변 수색을 중단하고 혹시 위층에는 뭐가 있나 올려다보니 멀찌감치 '인터넷 카페'라고 쓰여있는 카페베네가 보였다. 일반 승객도 사용 가능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안이 없으니 올라가 보기로 했다.
너무나 안락했던 인터넷 카페
카페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승객 이용 가능하고, 테이블과 의자가 넉넉하게 세팅되어 있었으며, 일부 좌석에는 노트북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의외로 사람은 적었으니, 완벽하다! 와이파이 도시락을 찾기로 한 4시가 될 때까지 카라멜 콜드브루를 마시며 이곳에 죽치고 있었다. 뇽은 여행지도를 정리했고, 나는 냉장고 비우기 작업 도중 사과를 평상시의 세 배쯤 먹은 탓인지, 화장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렸다. 알고 보면 카페보다 화장실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을지도.
와이파이 도시락 접수처는 약속했던 4시 전부터 붐볐고, 물건을 받아보니 파우치가 생각보다 너무 컸다. 안 그래도 가방에 빈 공간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들고 가야 하나. 그렇다고 와이파이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이참에 둘 중 한 명이 가방을 새로 사는 걸로 협의했다. 뇽의 크로스백이 낡았기 때문에 뇽의 가방만 사기로 하고 레스포삭에 들렀는데 아무런 명분도, 쇼핑 생각도 없던 내가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는 결국 둘 다 크로스백을 사버렸다. 현지에서 돈을 얼마나 쓰게 될지 모르니 웬만하면 국내 쇼핑은 자제하려 했건만, 견물생심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이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쇼핑을 마치고 나니 금방 먹었던 타워버거박스는 어디로 증발했는지, 도로 배가 고파졌다. 하필이면 식사 시간대에 딱 맞춰서 푸드코트에 도착하는 바람에 자리는 만석이었다. 뇽과 나는 그 어떤 맛집이라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건 질색인 사람들이라, 푸드코트 식사를 포기하고 게이트 근처에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기로 했다.
'컵밥'이라고 쓰여 있는 음식점을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는데 정작 그 가게에서 파는 음식은 놀랍게도 닭강정이었다. 졸지에 1일 2 닭이라니. 이러다 기내식에서도 치킨이 나오는 거 아냐? 심지어 매운 닭강정이어서 젓가락으로 고추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수고를 더했으나, 여전히 매웠다. 열흘 동안은 이렇게 매운 걸 못 먹을 테니 마지막 식사 메뉴로 적합했다고 애써 의미를 부여해본다.
출국 전 마지막 매운 맛
이제는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비행기만 타면 된다! 그래야 마땅했고 그럴 것이라 믿었건만, 말도 안 되게 뇽이 랜덤 검문에 당첨되고 말았다. 셀프 체크인 - 우편번호의 저주가 힘을 발휘했던 걸까? 한번 걸리면 그 뒤로도 공항 갈 때마다 걸린다던데. 쎄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