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뇽알 Jul 20. 2021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거였어?

남미는 배낭여행이라기에 배낭을 샀다

 1989년, 30대 이상의 내국인에게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정책이 시작됐다. 그나마도 신원보증인을 내세워야 하고, 반공교육도 받아야 하고, 나오는 것도 단수여권에 불과했지만 어찌 됐든 많은 국민들은 '돈만 있으면' 여행이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론 해외여행이 피부로 와닿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97년 IMF의 원인이 해외 골프여행 및 과소비 여행 때문에 왔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해외여행은 90년대 후반까지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고 고등학교를 다닐 때 까지도 같은 반에 미국이나 호주, 일본 등지로 가는 친구들은 전부 '아버지의 해외 발령'으로 가는 것이 전부였다. 나 역시도 20대가 되기 전까진 해외여행은 남의 이야기였는데, 보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호기심천국' 그 자체인 내가 간접적으로 해외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만물이 적혀있는 백과사전뿐이었다.



 당시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대다수의 집이 그렇듯이 우리 집에도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 마련한 노란색의 백과사전이 있었는데 나이를 꽤 먹을 때까지도 그림 없이 글만 있는 소설책 읽기를 거부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사진과 그림이 많은 백과사전을 탐독하게 되었다. 거기에 뭐하나 진득하니 끝까지 파지 못하고 모든 분야를 겉핥기 식으로 훑는 나에게 백과사전의 내용들은 그 가벼움과 다양함이 지극히도 내 취향이어서 언제든 바닥에 주저앉아 읽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그 백과사전의 수많은 주제들 속에서 단연코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세계 제7대 불가사의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집트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영국의 스톤헨지, 이탈리아 콜로세움... 그리고 페루의 마추픽추와 나스카 라인.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세웠는지 기록이 없고 정확한 축조 연도나 그 용도도 알 수 없다는 그것들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 한줄한줄이 모두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가보고 싶다. 나도 가서 직접 보고 싶다."

 하지만 90년대 초에 쓰여진 그 백과사전의 정보에 의하면 페루는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없고 또한 위험한 곳이라 쓰여있었다. 세계여행이 비교적 많이 자유로워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여자 혼자' 혹은 '여자들끼리'는 여행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지금도 치안상 위험한 지역이 있다고 하니 나 겁쟁이 에겐 '페루 여행'이라는 희망사항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지금까지 와는 다른 적지않은 용기가 필요했기에 마음속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2014년 여름. 한동안 잊고 지낸 페루가 다시 가슴에 비수날아와 꽂혔다. 어이없게도 한 예능프로그램 덕택으로.



 아예 다다를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가더라도 여자에겐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그곳.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면서도, 일본어를 읽지도 못하면서 일본 자유여행을 했고, 매일 총기사건이 벌어지는 뉴욕 맨해튼에서 아주 평화롭게 반년 동안 체류를 했으면서도 왜 남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뒤늦게 찾아보니 실제로 1980년대까지 마약, 정치폭력 때문에 위험했고, 2000년대 들어서 안정을 찾았다고 하니 언론에서 안전한 곳이라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여행 예능을 보며 카메라 뒤쪽으로 몇 명이나 있을지도 모르고 - 적어도 한 사람당 한대 이상의 카메라가 붙을 테니 -  그 많은 스들과 3명의 '남자'연예인이 함께 돌아다니는 콘셉트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로서는 꽤나 용감하게 '여자 둘이서 페루 여행'을 기획해보기로 했다. 누군가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외치고야 마는 성미는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남아메리카. 지구 반대편. 직항 없음. 편도 최소 28시간. 시차 때문에 돌아올 때 하루 없어짐. 계절 반대. 국내 환전 안됨. (미화 달러를 현지에서 페루 솔로 환전) 한국에서 10일 휴가를 내더라도 현지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은 7일 남짓... 페루 여행은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난관에 봉착한 느낌이었다. 일단 인천에서 미국 LA까지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 4~6시간 체류 후 다시 리마로 8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니. 상상만 했을 뿐인데 벌써 다리가 저려오는 것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렇다고 높은 등급의 좌석을 구매할 정도의 여유도 없었으니 상상만으로 고생문이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영어'가 아닌 두 번째로 많이 쓰인다는 '에스파뇰'을 쓰는 페루 사람들은 외국어를 배울 필요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말에 단 9일간의 여행을 위해 장장 6개월 동안 여행을 위해 갖은 준비를 해오면서 정작 에스파뇰은 숫자를 익히고 가격을 물어보고, 식당에서 직원을 부르는 단어 및 문장을 간단히 외우는 것 정도로 준비했다. 뭐 짧게나마 영어로 다 될 것 같다는 안일한 생각이 미래의 나를 괴롭힐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출퇴근과 이사 준비로 바빴던 그즈음에 어학 준비가 웬 말이냐.



남미는 배낭여행이라기에 배낭을 샀다.


 리마에서 나스카, 이카, 다시 리마로 돌아와 쿠스코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마추픽추를 보는, 아주 활동적이기 이를 데 없는 스케줄을 짜면서 우리는 과연 해외여행마다 함께한 '캐리어'가 이 여행 일정에 어울리는 지를 고민해봐야 했다. 사람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페루를 갔다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배낭여행을 했다고 하고 페루를 갔다 온 지인들도 (알의 친오빠와 사촌동생) 배낭여행하면 좋다고 하니 정말 이제야 비로소 '배낭여행'을 해보는구나 하고 설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배낭'의 무게는 상상해 본 적도 없으면서...


 학창 시절 급식이 도입되기 이전, 개인의 사물함이 가로세로 20~30cm 안팎이던 당시 책가방의 무게를 아시는가. 겨울엔 보온도시락을 들고 다녔고, 여름엔 얼음물을 싸가지고 다녔으며, 간편하게 검색이 가능한 두꺼운 영어사전도 있었고, 제2외국어 수업이 있는 날이면 지금은 읽지도 못하는 불어 사전도 있었다. 체육복은 매 수업시간마다 흘리는 땀 때문에 매번 가져와서 세탁해야 했고, 음악시간이 있으면 리코더 혹은 단소, 미술시간엔 스케치북까지 들고 다녔으니 당시 나의 건장함은 책가방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은 하굣길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움푹 파인 보도블록 때문에 발목을 살짝 삐끗한 적이 있는데 충분히 중심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삐끗함이었음에도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흔들리는 가방이 상당한 무게로 나를 땅바닥으로 잡아당겼고 삐끗한 순간 찰나의 예상보다 더 심각하게 나동그라진 일도 있었다. 그날 무릎이 가열차게 아작이 났는데 -켈로이드성 피부라 지금까지 상처가 남아있다- 집에 와서 무릎을 정리하기도 전에 '이 망할 책가방 무게가 대체 얼마이길래 나를 죽일 뻔하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체중계 위에 올려보았더니 무려 5.6kg라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난 그 어처구니없는 수치를 보고 나서야 헛웃음을 지으며 만신창이가 된 무릎을 겨우 수습했었다.


 이렇듯 가혹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배낭에 왠지 자신이 있었다. 그때는 10대였고 지금은 허리디스크가 있고, 거기에 몸무게도 10kg 이상 불었는데도 유구하게 자기가 나이 먹는 건 눈곱만큼도 인지하지 못하는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알에게도 '배낭여행을 하자'라고 권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생각지 못한 문제는 페루를 배낭여행으로 즐겁게 다녀왔다는 알의 친오빠, 사촌동생이 건강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건장한데다 여행 당시 20대 성인 남성이었다는 점이다.


 배낭여행이든 뭐든 여행이라면 반드시 싸야 하는 짐이 있다. 속옷, 양말, 세면도구, 화장품, 여분의 옷, 카메라, 휴대폰에 따르는 각종 충전기와 배터리. 거기에 결벽증으로 고생하는 나는 얇은 개인침낭과 슬리퍼도 있어야 했고 때마침 우리는 스타벅스의 '유아 히어'컬렉션도 수집 중에 있었으니... 페루 여행은 왠지 출발도 하기 전에 '판단 미스'의 무덤이라도 되려는 듯 잘못된 선택의 연속, 좋게 말해 '매 순간 에피소드 생성'의 출발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배낭여행. 당신의 건강과 나이를 생각해 봐야 할 때.

20대, 척추건강에 무리가 없다면. 고민 없이 떠나도 좋다.

30대, 디스크가 있다면 진짜 백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남미여행 한다고 꼭 배낭일 필요는 없다고 누군가 말해줬어야 했다!!!



* 나중에 언론사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선정하는 기준이 다르고 심지어 '불가사의'가 아니라 '경이로운'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맞다는 것을 알았을 땐 결국 별 의미 없는 타이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어떠랴. 실제 그곳에 갔을 때 난 '불가사의한 경이로움'을 보게 됐으니.




<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