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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스럽게 Nov 08. 2021

비는 내 운명

비 맞이 개인행사




© ed_leszczynskl, 출처 Unsplash



전라남도 보성에 가는 길이었다.

빠질 수 없는 보성 차밭 현장과

인간문화재 판소리 명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숲길에 접어들었다.

이른 시간 출발인지라 새벽녘

비가 좀 내렸던 모양이다.


온통 초록 가득한 숲 속 어딘가.

물안개인 듯 피어난 신비로운 습지대를

옆으로 끼고 달리는 중이었다.

서행하는 길에서  마주한 신비로운 광경.

소리 없는 는개비에 물안개가 피어나며

고요히 빛나는 나무숲 초록빛의 향연.

탄성이 절로 나왔다. "와!"

함께 동승한 스텝들 모두,

일제히 차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자연이 선사하는 숲 속 물안개의 경치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흔치 않은 정경이었다.  

뜻밖의 행운을 만난, 잊을 수없는 추억이다.



©nate_dumlao, 출처 Unsplash


기억의 회로를 찾아내려면

지난날을 헤집고 들어가야만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희미한 저장소의 미로 속 여정, 비 오는 날의 기록.  

신록을 벗어나 진초록이 시작될 무렵,

5월이면 익숙하게 맞이하고픈

비의 표정이 있다.

가랑비 옷 젖듯 한다는 그 비다. 이슬비다.

보슬거리며 살짝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일부러 차를 끌고 나간다.

향한 곳은 광릉 둘레길.

초록이 가득한 곳, 수목원길 드라이브를 했다.

서행구간이라 여유 있게 지날 수 있는 곳이다.


가랑비를 충분히 머금은

숲 속의 음이온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였다.

보슬비와 함께 한 광릉 수목원길 드라이브는

힐링 샤워 구간이다.

싱그러움의 그린 향기,

비 오는 날의 풀 내음을 맡는다.

숲 속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흠뻑 들이키고자 차창을 다 열고

시속 30km를 유지하며 여유를 부린다.

봉선사 일주문 앞에 주차를 하고 잠시 걸어도 좋다.


그 초록의 향기와 대기 중의 청량감은

어느 곳의 멋짐보다 더 귀한 무엇이었다.

그 무엇을 누리려 일부러 떠난

수목원길 드라이브의 조건은

더도 말고 '딱' 이슬비 무게여야만 했다.

주행하기에도, 음이온을 누리기에

적당히 이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음이온의 천국이었다.

공기 중의 비타민은 음이온이라고 했었나?


우산을 챙기고 준비물 가득한

무거운 등굣길에는

비가 반갑지만은 않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비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zhugher by pixabay


비와 함께 혼자 놀이.

어느 날, 비가 오면 창부터 열었다.

하늘이 보이게끔 위치를 정하고

비 오는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곤 했다.

진정한 비 멍, 하늘 멍이었다.

믹스커피를 익숙하게 타고

급하게 틀어 놓은 음악이 한몫 거든다.

그때는 '홈 카페'라는 개념이 없었던

아날로그 감성 짙은 90년대!

분위기를 한껏 잡고, 구색 맞춰

할 수 있는 한 준비한 음악과 커피 세팅.

비 맞이 개인행사를 자유롭게 치렀다.

치기 어린 내 젊은 날의 추억.



 © kadh, 출처 Unsplash



내리는 비가 좋다.  

모든 비를 좋아했다.

비가 내리는 날은 이유 없이 기분이 더 좋아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상관없이 비라면 그 모양대로 다 좋았다.

때마다 느리게, 조용히 왔다가는 빗줄기.

손을 내밀어보아야 확인이 가능한

방울방울 떨어지는 여린 비.

가루비, 비꽃이라는 예쁜 이름도 있다.

햇살 옆에서 기웃거리는 여우비.

생뚱맞아 재미있다.


누가 봐도 시끄러운, 세차게 퍼붓는 억수비.  

여름에 만나는 시원한 소낙비, 빠지면 아쉬울 비다.

아, 그 쏟아지는 장대비를 만나면

마음까지 시원해지고 소리마저 경쾌한 음악이 된다.

더위를 식혀주는 배려왕, 단비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도 맑고 영롱하다.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

지붕에 닿고, 땅 위에, 푸른 나뭇잎에 부딪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닿아 마주치는 소리.

온 세상을 적시는 비는

모두를 반긴다. 마른 갈증을 풀어 준다.


광활한 하늘을 무대 삼아

티를 내는 쇼맨십 강한 비도 있다.

그 이름은 뇌우.

사나울 줄만 알았는데

독무대를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도 가졌다.

천둥번개를 데려와 휘황찬란하게 한바탕

하늘에서 락 공연을 펼친다.

번쩍하며 콰광, 달싹 움츠려 드는 효과.

합동 공연은 경이로움의 극치다.



 ©Markus Spiske by pixabay



내리는 비 모양 그대로,

부족한 대로, 적당한 대로, 넘쳐나는 대로,

다 누려볼 수 있는 비다.

모든 비가 좋다.

그 뒤에 따르는 선물도 적지 않다.

존재만으로도 신기한 무지개는

그중 하나다.

비가 가진 모든 모양이 죄다 좋은 걸 보면

내 눈과 귀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나 보다.


'꿀비'라는 이름도 가졌다.

농사짓기 적당한 비에게 지어준 이름이란다.

때론 변덕이 심해 한참 동안 양동이로 퍼붓듯 하면

여기저기 물난리가 난다.

불어난 하천물에 차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농가의 피해는 더 크기에

조심스레 비를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바다 위를 휘몰아치는 폭풍우는

자연의 질서를 바로잡는 비라고 했다.

바닷속을 뒤집듯 솎아내어 불균형의 생태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낸다고 얼핏 들었다.

몰아치는 비도 일리 있는 타당한 논리를 지녔다.


이상 기후가 아니라면

'흔한 게 비'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지루한 장마라는 게 있긴 하지만,

그걸 빼면 생각만큼 그렇게 자주 내리는 비가 아니다.

이른 봄비는 새싹을 틔우는 봄을 맞이하고

여름날 장대비는 더위를 식혀주느라 바쁘다.

가을날의 소리 없는 비는 센티한 척, 분위기를 잡는다.

알게 모르게 다녀간 도둑비처럼

내 마음을 뺏는다.

겨울을 서둘러 부르는 늦은 가을비는 시크하다.

쌩하니 차갑기도 했다.

생경하게 만난 하얀 입김은

그에 따른 생채기다.

겨울비는 대체로 조용하다.

요란하게 내리지 않고  잠시 왔다 가는

신사적인 매너를 갖췄다.



 ©박유정 Alex park by pixabay


비 오는 날! 사람과 어울리면

평소와는 좀 다르기도 하다.

한 톤이 올라가거나

웃음소리가 더 방정맞다 싶은 게 의식이 될라치면

서로들 내뱉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날 굳이'한다고들 놀려먹는다.


비가 내리고 궂은날 시골에서는

마을회관에 모여

음식을 장만해 같이 나눠먹는다고 한다.

그 모임을 '날궂이 한다'라고 일컫는 댔다.

누군가는 비 오기 며칠 전부터

몸이 쑤시거나 욱신거리는 전조증상이 나타난다.

'비가 오려나?' 어르신들의 날씨 전망도 탁월하다.

어김없이 몇 시간 뒤, 며칠 뒤에라도

꼭 비가 온다는 것이다.

몸의 이상 신호가 날씨 예보관을 능가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적당히 단비가 되어주고,

계절에 따라서는 꽃비 효과를 연출하고,

누군가에게는 눈물이 섞여

속울음을 가려주는 고마운 꿀비.

그렇게 먼지를 씻어내고,

우리의 마음도 도닥여주는

자연 치료사, 비에게

느닷없이 애정을  표현하고 싶다.

영원히 사이좋게, 친구 하자.



©susannp4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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