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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미스럽게 Dec 11. 2021

나의 살던 한옥집

한지붕 세 가족


© sql, 출처 Unsplash


한지붕 세 가족

나는 70년대 출생 X세대이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로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던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때 그 시절, 그 어린 날의 기억! 80년대 무렵이다. 나의 살던 한옥집은 전통 가옥구조라기보다는 현대인에게 맞게 개량된 것으로 빨간 기와지붕이 올라간 대청마루가 있는 집이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전근을 따라 살던 그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거처했던 집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신학기에 전학을 가게 됐고, 전학 간 곳의 우리 집은 양옥으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살던 어린 날의 터전은 빛바랜듯한 빨간색의 기와지붕이 올려진 단층 한옥집이었다.


© dcashbaugh, 출처 Unsplash


추억하는 어릴 적 한옥집은 대문 세 개가 나란한 골목길 제일 끝에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문 옆 조그만 환기창과 연결된 재래 화장실이 바로 위치했다. 그 시절에는 아래로 구멍 뚫린 재래화장실에서 용무를 보았는데 화장지보다 신문지가 주된 닦는 용도로 쓰였고, 밤에는 오빠나 아빠 지킴이가 따라나서아하는 화장실 행차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4남매를 위해 요강을 준비해두시기도 했다. 화장실의 새까맣고 조그만 구멍이 차오른다 싶으면 어김없이 초록색 담당 환경차가 찾아온다. 골목길 바깥에서 정차하고 기다란 호스로 성큼 들어와서는 내용물을 야무지게 흡입하고 갔다. 그 환경차를 만나게 된 날이면 '재수 좋다'는 흔한 말이 뿌려지기도 했던 시절이다. 화장실 옆으로 타일 바닥의 욕조가 있는 목욕탕이 있고, 연탄이 가득한 창고가 연달아 나란히 있었다. 이 세 칸의 위쪽은 'ㄱ'자형 옥상이다. 대문을 열고 이 세 개의 문을 지나 앞쪽으로 몇 걸음을 떼면 우측에는 부모님이 세를 주었던 방 두 칸짜리의 전셋집이 나온다. 셋집 안방으로 연결된 부엌문이 있고, 부엌 옆으로 작은 방과 연결된 문턱 높은 출입문이 하나 더 있었다. 반대편에는 대문과 연결된 옥상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이 있다. 계단 아래 빈 공간에는 개집이 있었는데 여러 번, 반려견들의 출생을 지켜보는 신성한 곳이었다. 우리 집을 지키던 해피, 메리의 짖는 소리는 든든하고도 정겨웠다. 그리 높지 않았을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보면 엄마가 손수 만든 장이 담긴 제법 커다란 옹기항아리가 왼편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앞으로 더 전진하면 대문과 연결된 구석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그 자리는 대문 옆 골목 담벼락으로 손을 내민 무화과나무와 감나무가 손에 닿았다. 그리 넓지 않은 기역자형 옥상은 여름날이면 쐐기벌레들의 주무대였다. 느림보 걸음으로  꼬물거리던 갖가지 쐐기벌레들의 패션은 화려했다. 저마다 다른 색과 생김새가 참 오묘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집 대문에서 우측으로 바로 걸어 들어가면 6명의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이 보인다. 안방의 창호지 창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때론 구멍이 뚫려 있기도 했던 종이로 덧댄 창문을 기준으로 왼편으로 몸을 돌리면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턱이 높은 마루와 난다. 대청마루 한편에 지금 다시 유행하는 마크라메 행잉이 걸려 있었다. 바깥과 집안 내부를 구분 짓는 여닫이식 문은 반투명의 기다란 유리가 걸린 나무 재질로  여러 개의 문이 왔다 갔다 하며 바쁜 슬라이딩을 반복해야만 열렸다. 간혹 삐거덕대며 뻑뻑하게 고집을 피우듯 말을 잘 안 듣기도 했다. 마루는 윤이 나는 니스칠이 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한옥집이었다. 닳은 마루에 니스칠 작업을 맡긴다거나 겨울 대비차 창문의 뜯어진  창호지를 붙이는 작업도 연중행사를 치러야 했다. 어머니가 새 풀을 쑤어 만들고 납작한 붓칠로 풀을 발라  뼈대만 남은 나무 창틀에 새 창호지를 붙이는 작업을 직접 하셨다. 방과 방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우리 집 마루는 기다란 나무들의 가지런한 행렬로  쭉 뻗어있는 형태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곧았다. 정면에는 양쪽 경첩으로 달린 기다란 문이 있었다. 밀어젖히면 바로 이웃집 담벼락이다. 까치발을 세우면 이웃집이 살짝 엿보였다. 여름날이면  담 넘어 오고 가는 바람이 기분 좋게 시원했다. 바로 옆에는 4남매의 방, 양쪽 유리가 들어찬 옆으로 밀어 여는 문이 있었다. 큰오빠가 쓰는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방 안 우측 끝에는 문이 또 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문이다. 삐거덕대는 나무계단을 몇 개 오르면 쓰지 않던 물건이 정돈되지 않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놓여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활용도 괜찮은, 고마운 창고다. 허리를 낮춰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낮은 천장이었음에그런대로 좋았던, 숨은 공간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오래된 듯한 쿰쿰한 냄새가 싫지 않았다. 때론 무섭기도 했지만 꽤나 쓸모 많은 소꿉 놀이터 다락방이다.  비밀스러운 듯, 신비롭고 작은 우리들만의 공간이었다.



마당에서 마루 문을 열면 바로 오른편에 앞쪽으로 열어야 하는 안방 문이 나온다. 햇살 가득 창호지 창이 우측에 줄 서있고, 창호지 창 아래에는 짙은 밤색의 커다란 전축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면 마주 보이는 건 빛나는 여러 빛깔의 자개농이 있고, 옆으로 작은 화장대가 있었다.



기다랗고 제법 큰 방이었는데 구석의 옷걸이에는 자유로운 형태의 옷들이 제 멋대로 걸려 있었다. 구석진 곳의 작은 문은 어른 키로는 고개를 살짝 숙여야 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장판이 깔린 부엌으로 바로 연결된 문이다. 거기에는 성냥불로 불을 켜는 휘발유 곤로가 있었고, 크지 않은 찬장과 살림살이 그릇류를 놓는 작은 선반, 두 칸짜리 냉장고가 부엌을 채우고 있었다.



바깥으로 연결된 문을 열면 전용 슬리퍼를 신어야만 한다. 물기 축축한 한옥집 외부 공간이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혼재한 수도가 있고, 갈색빛 고무통이 함께 바늘과 실처럼 놓여 있었. 거기에서 엄마식재료를 씻고, 다듬고, 우리 4남매는 세수하고 양치하고, 때론 목욕까지 해결하곤 다. 안방과 연결된 연탄 떼는 화덕이 바깥으로 있었는데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생선이나 피꼬막을 굽기도 하고 옹기 약탕기를 올리던 곳이다. 겨울에는 상비용 따뜻한 물을 담고 있는 커다란 알루미늄 솥이 주로 올려져 있었다.



통로 앞쪽에는 기다란 한 칸짜리 방이 있었다. 독채처럼 우리 집 한옥과 떨어져 있는 작은 집 구조였다. 삼 남매가 세 들어 살았는데 동생들을 살피던 그 집 언니는 착하다는 칭찬을 엄마에게 곧잘 들었던 심성 좋은 분이었다. 독채 그 방, 자그마한 부엌에는 우리 집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문이 연결되어 있었다. '쪽문'이라고 불렀다. 그곳의 문을 열고 나가면 냄새나는 또랑이 흐르고 있었고, 여러 갈래의 골목길이 나왔다. 조금만 걸어가다 보면 친적집이 있었는데 그 친척 언니에게서 오빠들과 언니는 과외를 받았다. 근처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었고, 운동장에서 철봉 놀이를 하면서 친구들과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빨간 기와지붕의 우리 집은 '이웃사촌'이란 말이 와닿는 한 지붕 세 가족이었다. 전셋집에서 세 들어 살던 아줌마는 어린 아가를 키우는 젊은 분이었는데, 나만 보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놀렸다. 로 믿고 서럽게 울던 나를 보면서 웃던 엄마가 생각이 난다. 엄마와 옆 방 셋집 젊은 아줌마, 심성 고운 건넌방의 언니, 세 사람은 자매처럼 잘 지냈다. 오고 가는 정, 인심 좋았던 80년대 그리운 시절이다.


기억나는 일부분만 적어나가더라도 한참 그렇게 줄줄이 쓰게 된다. X세대 어린 날의 한옥집은 여러 기억들의 단편 모음집이다. 나의 살던 한옥집! 세 들어사는 가까운 이웃들, 옥상과 연탄불, 다락방, 골목길과 동네 학교 운동장, 언니, 오빠들의 과외까지, 한데 어우러진 추억의 복합 문화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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