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주화 가족의 '유럽자동차여행'(12)

왜 이렇게 바쁜 걸까

by 엘리
생말로의 해변. 바다에 둑을 쳐 간조 (干潮)에 인공 수영장이 만들어진다.

생말로의 해변. 바다에 둑을 쳐 간조 (干潮)에 인공 수영장이 만들어진다.

숨 가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우리는 여전히 바쁘다.


몽생미셸을 오가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그냥 하루를 쉬기로 했다. 여행은 목표량이 정해진 의무사항이 아니다. 그래도 ‘몽땅 쉬기’는 뭔가 찜찜해, 1시간 거리의 생말로(Saint-Malo)에 낙조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다.


여백이 많은 오늘 하루는 무척 여유로울 것이라는 기대감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일과의 시작은 밥 짓기. 아침 8시에 전기밥솥으로 밥을 했다. 국은 배추 된장국을 준비했고 반찬으로 멸치볶음, 김, 장조림, 김치를 꺼냈다. 머무는 방에 테이블이 따로 없어, 우리 가족은 의자에 상을 차려 후루룩 냠냠 맛있게 먹었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나서 드립 커피를 한 잔 내려주었다. 진한 향이 묻어나는 커피 한 잔. 그 여유를 마시는 시간이 좋다.


오전에 딸아이 3학년 교과서를 펴서 함께 읽었다. 국어는 내가 담당하고 수학은 남편 몫이다. 아이의 자발성과 집중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진도는 아이가 원하는 만큼!

숙소 근처의 까르푸 매장.

세면대에서 그동안 밀린 양말과 속옷을 빨고 나서 우리 가족은 숙소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 까르푸. 그곳에서 양파, 파, 맥주, 와인, 우유, 시리얼, 소시지, 귤, 올리브기름, 달걀, 구슬을 구입했다. 스테이크용 소고기도 샀는데, 가격은 한국의 절반 이하였다.

사실, 먹는 것에 대한 여행 계획은 집에서 가져온 인스턴트식품을 빨리 먹어 짐의 부피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마트를 다녀온 후 계획을 수정했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으로. 그만큼 신선육의 상태와 가격이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고기를 구우려면 전기 프라이팬이 필요했다. 까르푸의 가전제품 쪽으로 가 보니 넓적한 돌판 같은 프라이팬이 여럿 보였다. 그중에 가장 저렴한 것으로 하나 골랐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박스를 열어보니, 불판 바닥 한쪽에 동전 크기 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무슨 용도인지 고개가 갸웃!


기름기가 많은 삼겹살이면 몰라도 스테이크 굽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올리브기름을 많이 뿌려야 고기가 덜 타는데, 불판 바닥에 구멍이 나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다시 까르푸로 가서 반품해 달라고 했다. 젊은 남자 직원은 그 프라이팬을 한참 동안 지켜보더니 전원을 연결해 작동여부를 확인했다.


‘방금 전에 구입한 건데 꼼꼼하게도 검사하네. 쓰지도 않고 가져왔는데…’

까르푸.

그런데 뜨거워진 불판 위에 손을 올리는 그의 제스처를 보니 반품을 위한 검사가 아니었다. 내가 상품에 이상이 있어 가져온 것으로 이해한 듯.

영어로 “반품하러 왔다”라고 그 직원에게 재차 말했지만, 의사전달이 안되는 거 같아 휴대폰으로 ‘반품’이라는 단어를 프랑스어로 찾아 보여주었다. 그제야 환불이 일사천리로 마무리됐다.


다시 가전제품 코너로 가서 전기 프라이팬을 살펴보니 불판에 모두 구멍이 뚫려있었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 신선한 육류 섭취로 식단을 바꾸려고 하는데, 첫 단계에서부터 좌절인가. 실망감이 확 밀려왔다.


어, 그런데 한편에 있던 전기 튀김기(?)가 눈에 들어왔다.


‘퐁듀 만들기용’이라고 쓰여있는데, 스테이크를 하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모양새가 뚜껑 없는 전기밥솥이었고 냄비바닥이 일반 프라이팬보다 깊어, 기름이 사방에 튀지 않을 것 같았다.

새로 장만한 퐁듀 조리기에 간장 소스로 만든 고기 요리.

화력은 만족스러웠다. 숙소로 돌아와 들뜬 마음으로 전원을 연결하자 금세 바닥이 뜨거워졌다. 사이즈도 마음에 들었다. 여행하면서 가지고 다니기에 딱이었다.

흥건하게 뿌린 올리브기름에 고기를 올리자 지글지글 잘 구워졌다. 딸아이를 위해 양념 불고기도 만들었다.


흡족한 오찬을 즐긴 우리는 디저트로 귤을 먹었다. 오후에는 숙소 1층 카페테리아로 내려가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그곳에서 나는 스케치북에 몽생미셸을 그렸고 딸아이는 일기를 썼다. 남편은 책을 읽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심심한지 자꾸만 옆에 와서 애교를 부렸다. 같이 놀자는 것이다. 각자의 자유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20분 만에 방으로 돌아와 마트에서 산 구슬로 구슬치기를 했다. 남편과 딸아이는 늘 그렇듯 티격태격 하며 싸우고 화해했다.

3종 세트로 불어난 조리 기구들. 가운데가 퐁듀 조리기.

생말로*의 노을 구경을 위해 저녁을 일찍 먹었다. 카레를 끓였고 오전에 까르푸에서 사 온 소시지를 종종 썰어 넣어 끓였다.

오후 5시쯤. 우리는 1시간 거리의 생말로를 향해 출발했다. 바닷가 성벽에서 바라본 일몰은 아름다웠다.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더니, 성벽이 감싸고 있는 오래된 건물과 도로까지 채색했다. 딸아이는 낙조가 내려앉은 바닷가에서 조개를 주웠다.

해안가 성벽도시 생말로.
성벽 위에서 노을을 기다리며

숙소에 돌아오니 어느새 밤 9시. 간단하게 씻고 나서 딸아이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절반 정도 본 뒤에 잠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와인을 한 잔 했다. 오늘은 푹 쉬기로 했는데도 여백 없이 하루가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왜 이렇게 바쁜 거지?”

식사후에 자기 것은 스스로 설거지 하는 딸아이.

장기간 여행은 유목 생활이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과정을 반복하며 옮겨 다닌다. 새로운 곳에 대한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음식도 사 먹기보다 해 먹는 게 많다. 그러다 보니 준비과정이 필연적이다. 한국에서는 세팅이 안정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돌발상황도 자주 발생한다.

같은 ‘24시간’이라고 해도 여행지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더 길면서도 압축적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가족 간에도 각자의 일정이 있는 반면 여기서는 하루종일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하루’를 온 가족이 공유하다 보니 전체적인 시간은 더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한국에서 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들고 다니는 많은 짐들도 행복 보따리로 다가온다. 이젠 시간도 날짜도 잘 확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좋은 건, 같이 밥을 먹고 여행을 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 늘 곁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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