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알고 있어도 입을 닫아야하는 현실
입사한 지 1년하고도 4개월이 지날 때였다. 이제는 듣고 싶은 답을 들을 수 있는 독심술(?)까지 통달할 정도로 자신감도 붙었다. 위드 코로나 덕분에 여러 행사에도 초대돼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내고 있었다.
봄바람도 살랑 불고 있으니 주말을 이용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렌터카 차량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주말 아침부터 학교 선배에게 전화가 왔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선배는 한 분밖에 없었다. 어느 철도 현장에서 일하는 학교 선배였다.
야! 큰일 날 뻔했어
큰일? 도대체 이놈의 현장은 평화로울 때가 없을까?
그런데 선배의 목소리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스피커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 톤은 여느 때와 달랐다. 기자의 촉이 발동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 게 분명하다. 평소였으면 듣는 등 마는 등 했을 텐데, 이번에는 선배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보기로 했다.
열차 두 대가 정면으로 충돌할 뻔했어. 기관사가 대응을 잘해서 망정이지
선배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단선 구간에서 A 열차와 B 열차가 모 역에서 교행하는 과정에서 두 열차가 같은 타는 곳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기관사는 선로전환기가 이상하게 돌아간 것을 확인했고 즉각 열차를 멈춰 세워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 교행 : 단선 구간에서 마주 보고 운행하는 두 열차를 역이나 신호장에서 서로 비켜 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철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선로전환기를 잘 못 돌린 직원의 잘못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철도는 그리 부실하지 않다. 애초에 한 승강장에 열차 두 대를 못 들어가게 신호 시스템이 설계돼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관사가 신호를 무시했더라도 열차가 자동으로 멈춰 세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동으로 멈춰지지 않았고 기관사가 직접 세운 것이다.
두 열차는 디젤동력으로 달리는 열차다. 만약 정면충돌이라도 했다면 대형 참사가 났을지도 모른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도 주변인을 통해 들을 이야기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사실상 공이 나에게 온 상황이다. 이젠 내가 알아내야 하는 시간이다.
여행을 갔다 오고 평일이 되자 곧바로 열차 운영사에 찾아갔다. 데스크에는 따로 보고하지 않았다. 설령 그 선배가 현장에 일하고 있더라고 건너들은 이야기는 팩트가 아닐 수 있어 보수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자칫 잘못 보고하면 내 처지가 상당히 곤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출입처로 내려갔고 약 2시간가량 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사실이었다. 열차가 정면충돌할 뻔했고 기관사의 순간적인 기질로 사고를 막았다는 것을. 사고는 아니지만, 사고조사 관계자에게도 물어봤다. 역시나 사실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건 전날, 당시 해당 역은 야간에 신호 작업이 있었다. 열차 운영사가 아닌 시설 관계사의 작업이었다. 이들이 신호기 케이블을 잘못 꽂고 제대로 검사를 진행하지 않아 신호 체계를 무력화한 것이다. 과거 강릉에서 일어난 KTX 탈선사고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했다. 말하지 않고 출입처에 내려간 잘못에 사과했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이제 내가 쥔 공을 데스크에 넘겼다. 기사는 초고까지 완성했다. 보도할지 결정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쓴 기사는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다. ‘시설 관계사’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나는 강력하게 보도를 원했다. 그해 크고 작은 철도 사고가 예전보다 많이 발생한 만큼 언론사로서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었다. 단순히 운영사를 옹호하고 시설 관계사가 나쁜 놈이라는 낙인도 찍기 싫었다. 철도에서 일하는 모두가 ‘정신 차리길’ 원했을 뿐이다. 관계? 중요하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 관계사와 척지기도 싫었다. 난 적당한 선에서 멈추려고 했다.
데스크가 보도를 원치 않는 모양새로 나가면서 이 건은 사실상 흐지부지 넘어가나 싶었다. 언짢은 기분만 남겼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신문사의 생리를 거스르기에 내 연차는 너무 작다.
그런데 며칠 후 데스크는 나에게 갑자기 보충 취재를 지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