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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타미 Jan 26. 2023

나는 이중인격자다.

그렇게 나는 자본에 굴복한 ‘기레기’가 됐다.

언론사의 돈줄은 광고다. 아무리 뉴미디어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했더라도 한 해 매출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언론 광고는 기자와 홍보 담당자 간의 인맥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래서일까? 마이너 언론사로 갈수록 기자의 취재력보다는 인맥으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한다.


산업부는 광고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서이다. 출입처가 곧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부 기자들에게는 광고주를 관리하는 역할까지도 부여받는다. 만약 기업이 광고를 집행하지 않는다면 기자는 그 기업의 안 좋은 것만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거래를 요청한다. 기사를 내보낼지 광고로 묻어버릴지.


기업과 언론은 이렇게 관계를 형성한다. 어떤 기업을 비판하는 기사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도 기업이 언론사에 거액의 광고를 집행해왔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언론사는 광고주의 나팔수가 된다. 기업이 언론을 통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광고를 집행하지 않고 기사로 ‘퉁’치는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A사와 B사는 서로 경쟁사이다.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펼치면 A사는 이득을 보지만 B사는 손해를 본다. 이때 B사는 언론사에 광고를 집행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언론사는 B사의 요청대로 정부를 비판한다. 이것이 기업의 ‘언론 플레이’다.


입사한 지 3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아직 신입 티를 벗지 못할 때였다. 출입처 한 곳을 선배와 같이 방문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따라가기만 바빴다.


출입처에 도착하고 친절한 직원이 어디론가 안내해주었다. 응접실이었다. 그곳에는 양복쟁이 두 명이 앉아있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보아도 비싼 옷임을 알아챘다. 처음 본 두 사람이지만 선배는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윽고 나는 두 사람과 명함을 교환했다. 그들은 기업의 상무와 부장이었다.


부장은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복잡한 내용이 담겨있었지만, 정부 정책으로 우리 회사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주장이 담겨있었다. 오히려 경쟁사는 정부 정책으로 혜택을 받아 시장이 불공평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없었다. 회사마다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중립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싣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미팅을 마친 뒤 국장은 이 회사의 견해를 담은 기사를 쓰라고 지시했다. 이 기사는 인터넷판이 아닌 지면으로 나갈 계획이었다. 무려 전면기사였다. 그때만 해도 ‘이래도 괜찮을까’라는 생각보다 내 이름이 걸린 기사가 종이신문에 나간다는 기대감만 컸었다. 알고 보니 이 기사는 몇백만 원 후원으로 만들어진 기사였다. 언론사의 뒷광고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시간이 지나 입사 10개월 차에 접어들 때였다. 불과 몇 달 전 그 회사가 우려한 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좋은 발제 거리이자 기삿감을 찾았다는 뜻이다. 산업 구조가 개편되기 때문이다. 곧바로 데스크에 기획 기사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데스크는 4편짜리 연재 기사로 내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취재 기획안을 제출했다. 서론에는 그간의 진행 상황을 짚어보고 정책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전문가들의 고견을 담았다.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식 구조다. 하지만 원칙은 지키기로 했다. 절대 누구의 편을 들지 않기로.


하지만 회사는 달랐다. 경쟁사의 나팔수가 되는 것 마냥 되레 정책 강화가 필요하다는 논조를 원했다. 경쟁사가 시장을 지배해야된다는 주장도 필요했다. 그것도 내 이름이 달린 기사로 말이다. 3개월 차 때 쓴 기사와 180도 다른 논조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었다.


기사 작성을 거부했다. 불과 몇 개월 전, 내가 쓴 기사와 지금 써야 할 기사의 논조가 다르다면 신뢰가 떨어지지 않는가. 내 기사는 내 이름 석 자가 달릴 만큼 큰 책임을 지어야 한다. 나는 윤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 업무를 거부했다. 기자는 다른 직업과 달리 ‘윤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도 결국 회사원이다. 위에서 까라면 깔 수밖에 없다. 자고로 신문사는 군대 다음으로 위계질서가 가장 뚜렷한 집단이다. 고집을 부린다면 내 돈줄이 막히는 이 잔인한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내 희망이 돈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씁쓸할 뿐이었다.


결국 사주(社主)가 원하는 대로 기사는 나오게 됐고, 원치 않았던 어그로 덕분인지 조회 수는 급증하게 됐다. 그러나 나는 자랑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쪽팔렸다.


이날 나는 기자가 아닌 자본에 굴복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기레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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