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용기
평생 핼러윈에 의미를 두고 산 적이 없었으나 이곳은 몇 주 전부터 떠들썩했다. 기숙사 로비, 학원 리셉션, 마트, 옷가게 어딜 가든 온통 핼러윈 장식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죽하면 도대체 핼러윈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유래까지 찾아봤다니까? 친구들을 만나면 안부인사 대신 핼러윈 계획을 묻는 게 당연해졌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거였다. 결국 핼러윈 일주일 전부터 본격 핼러윈 즐기기에 나섰다.
브리즈번 시티 근처 사우스 뱅크에선 핼러윈 행사가 한창이었다. 나는 핼러윈 전 주말, 이곳을 미셸, 퓌비, 시예와 함께 찾았다. 미셸은 내 룸메이트, 시예와 퓌비 미셸의 소개로 알게 된 친구들이다. 시예는 대학원에서 생물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인, 퓌비는 말레이시아인이지만 부모님이 중국인인 덕에 중국어에 영어까지 능통한 친구였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trick or treat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아이들로 가득했다. 사탕 바구니를 손에 꼭 쥔 채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사실 나는 결혼과 육아에 회의감을 느끼는 전형적인 20대였다. 그런데 요즘은 종종 아이들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퇴근 후 삶이 보장된 사회.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들. 이런 곳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핼러윈 행사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이벤트를 경험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아이들처럼 놀이터에서 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료 페이스 페인팅 줄은 너무 길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구글맵을 켜 평점 좋은 레스토랑을 골라 맛있는 밥을 먹었다.(타이 음식점에서 파인애플 볶음밥을 시켰는데 양이 너무 많아 시예와 나누어 먹었다. 족히 3인분은 되는 듯했다.) 식후엔 달달한 디저트까지 빼먹지 않고 챙겼다. 그리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퓌비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퓌비는 회화 실력을 어떻게 늘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현지인들과 대화하고 싶으면 교회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건넸다.
핼러윈 당일엔 어학원에서 만난 동갑 친구 은빈이와 시간을 보냈다. 매운 음식과 소주가 그리워지던 찰나, 마침 잘 맞는 한국인 친구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다른 옵션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냥 한국식 포차에 가기로 했다. 코스튬을 한 사람들로 가득할 거란 예상과 달리 술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한산했다. 우리가 본 건 예수님, 그리고 팅커벨과 웬디 정도.
한국식 술집에 들어서자 점원이 자연스레 우리를 한국어로 응대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알아보는 이런 일은 어딜 가나 일어났다. 분명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덕분에 내가 정말 한국인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이다. 우리는 닭발에 소주를 주문했다. 닭발은 냉동에 소주는 한 병에 15불이었지만 넘치게 즐거웠다. 순간순간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스칠 정도로.
핼러윈 다음 날인 금요일엔 유리와 민지, 아오미와 클럽에 가기로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클럽을 간 게 언제였더라. 아마 대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그러니까 4년 전. 그런 문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이 아니면 외국의 핼러윈 클럽을 경험할 기회가 영영 없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호기심이 전부였다.
브리즈번에서 클럽 하면 모두들 포티튜드 밸리를 이야기한다. 직역하면 불굴의 용기의 골짜기. 왜 이런 지명이 붙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솔직히 내 용기는 조금 부족한 상태였다. 오후 10시의 클럽은 너무나도 한산했다. 이런 분위기가 어색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알코올이 간절했다.
호주에서 술을 사려면 ID카드를 가지고 지정된 주류 판매점에 가야 한다. 길에서 술을 먹는 것 또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산한 공터로 향한 우리는 쭈그려 앉은 채 깡소주를 들이켰다.
이후로는 클럽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박자에 상관없이 몸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중간엔 당이 떨어져 피자까지 사 먹었으나 새벽 3시쯤 되니 도무지 내 체력이 버티질 못하더라.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음에도 다음날엔 끔찍한 행오버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나는 그동안 몸을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오늘의 경험으로 알게 된 건 정말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창피함을 이겨내는 건 오롯이 내게 달린 일이라는 것.
어쩌면 앞으로의 난 지금보다는 조금 더 용기 있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