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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jeje May 10. 2024

깨져버린 약속이 만들어 준 ‘정(情)’이라는 포만감

에세이 


기다리던 약속이 취소되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누군가, 특히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날을 기다리는 것에는 설렘이 함께 한다.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은 오랜만에 보게 되는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나 궁금함과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만나면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할 때 친구가 반응해 주는 정스러움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하루를 위해 다른 약속은 잡지 않고 너무 만나고 싶었던 친구라면 일정을 조정하면서까지 기다릴 때가 있다. 한데 그런 약속이 하루 전이나 불과 몇 시간 전에 취소되면 그때 어떤 기분이 될까.

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오늘 약속을 위해 내가 한 약속을 취소시킨 다른 분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 난감함은 미안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친구의 갑작스러운 약속 취소로  때론 수치감도 올라온다. 내 잘못도 아닌데 뭔가 내 문제로 상대가 약속을 취소한 것 같고 내가 갑자기 중요한 사림이 아닌 것 같아 올라오는 감정이다.

그런 날은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을 메꾸기 위해 만나는 것 같아 밝은 기분으로 누군가를 맞이할 자신도 없고 갑자기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무기력 상태가 되고 만다.  

   

나의 상황을 알아차린 딸이 조심스럽게 외출을 제안해 왔다. 북적거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딸과 나에게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한 쇼핑가는 특히 심란한 내게 위로가 됐다. 

동물병원에서 고양이와 강아지들 재롱도 보고 우리 집 강아지를 위해 자연산 간식을 사고 흐뭇해하기도 한다. 긴 줄 때문에 늘 아쉽게 돌아섰던 추로스 맛집 가게에서 뱅쇼까지 사서 들고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그 맛에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브레이크 타임을 내건 음식점 앞에서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이미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왠지 우리도 줄을 서야 할 것 같아 무작정 그 줄에 합류했다.


음식점 긴 줄을 보면  의식 없는 충동적 욕구가 본능적으로 그 줄에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 그리고는 이내 알아차리는 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갈등은 생긴다.  시간에는 강박적인 나이기도하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허기를 견디기가 더 힘들 것 같아 이번에는 갈등 없이 줄 서기를 포기했다.

대신 한산한 만두집에 들어가 호탕과 볶음면, 납작 만두를 시켜 놓고 보니 줄을 선 맛집 또한 아쉽지 않았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커플이 다 먹지 못하겠다며 주먹만 한 고기만두 2개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시키고 싶은 메뉴가 많아 고민하다 마침 포기한 왕만두다.      

젊은 커플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 난 우리 것도 남을 것 같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딸이  얼른 고맙다며 만두를 받았다. 그러더니 우리가 시킨 납작 만두 두 개를 그 커플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평상시 내가 알고 있는 딸을 생각할 때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라 멋쩍고 낯설었지만, 그런 모습이 왠지 싫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 커플이 납작 만두를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깨진 약속으로 응어리졌던 가슴의 이물질이 말끔하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에피소드로 식사를 하는 내내 묘한 흥분감에 입맛조차 놓쳐버렸지만, 마음을 채우는 포만감으로 만두는 결국 포장해야 했다.  

   

나의 하루는 대부분 나보다는 아래의 연령층을 만나는 시간이 많다. 그것이 감사하면서도 가끔은 젊은 사람들 앞에서 긴장감으로 경직되고 있는 나를 알아차릴 때가 있다. 나는 젊었을 때 나이 든 분들이 보이는 불편한 행동이나 언행에 대해 불편함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면서 의식적으로 젊은 사람들 앞에서 조심하려는 긴장감이 있다. 그나마 일을 하면서는 세대 차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상으로 돌아오면 암암리에 내 연령에 맞는 본성이 드러나고 만다.

    

섣부르게 조언하는 것을 삼가는 것은 당연하고 나이 탓인지 순발력이나 이해가 늦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도 선 뜻 물어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다. 실지로 말을 붙이면 이유도 알아보지 않고 눈살에 먼저 힘이 들어가는 젊은이들도 있다. 때론 자식도 그러는데 일식면도 없는 나이 든 사람에게 보이는 당황하는 모습 당연하다.  

 그런데 먼저, 그것도 식당에서 젊은 커플이 먼저 다가와 준 것이 나는 놀랍고 반가웠고 그야말로 신선했다.


기다렸던 사람과의 깨져버린 약속 대신 우연히 만나 소소하게 정을 나누고 헤어진 그 커플을 어디선가 다시 만난다 해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비었던 마음에 포만감을 준 순간의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내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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