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즐거운 제주 한달살기
세렌디피티 serendipity는 뜻밖의 재미, 예상치 못한 발견이란 뜻이다. 제주에 한 달 살면서 많은 세렌디피티를 만났다. 의도하지 않았던 행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들이다. 맘 푹 놓고 여유롭게 생활해서일까 아니면 한 달을 거의 무계획으로 지냈기 때문일까? 기대하지 않던 선물을 많이도 받았다. 기억에 남는 일화를 더듬어본다. 여행 가서 뭘 많이 하기보다는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자. 마음을 열고 느리게 지내다 보면 누구든 이런 행운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제주 한달살이를 통해 배웠다.
제주에 한 달 머무는 첫 숙소는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깨면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이리 봐도 나무들 저리 봐도 나무들 산새 소리가 가득한 푸른 곳이었다. 숙소를 나와 오른쪽으로 돌았더니 세상에나. 봉숭아가 돌담 아래 쪼르르 분홍 빨강 꽃을 피우고 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 100미터가 이렇게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봉숭아는 처음 본다. 이슬 맞은 꽃들이 싱그럽고 예쁘다.
봉숭아 물들인 게 언제였더라... 어릴 적 엄마가 매 해 봉숭아 물들여주셨던 기억이 났다. 한밤에 꽃과 잎을 넣고 빻아 손톱 위에 얹고 실로 정성껏 묶어주시면 설레는 맘을 안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비닐을 풀러 손톱을 확인하면 내 열 손가락은 어김없이 쪼글쪼글 할머니 손가락이었다. 엄마의 손은 붉게 물든 손톱과 어울려 탱글탱글 예쁜데 말이다. 이미 일찍 일어나서 집안일을 한참 하고 계셨으니 당연한 거였는데 나는 그게 참 신기했더랬다.
'그래! 아이들과 함께 봉숭아 물을 들여볼까??'
아침에 잠깐 스쳐간 생각이라 이곳저곳 여행하며 잊어버리고 있다가 숙소에서 체크아웃하는 날 기억이 났다. 잠깐 차를 세우고 아이들과 함께 봉숭아 잎과 꽃을 조금 따왔다. 새 숙소에 짐을 풀고 우선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밤늦게 우리들의 봉숭아 물들이기가 시작되었다. 손톱 물들이는 건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터라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났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곳은 임대한 집이라 아무런 도구가 없고 집주인도 없다. 급한 대로 차에 있던 1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아 나무젓가락으로 콩콩 빻기 시작했다. 백반이란 것이 필요하던데 그런 건 당연히 없다. 주방에서 소금을 가져와 조금 넣었다. 익숙한 초록 덩어리가 만들어져서 비닐랩을 조금 잘라 묶어야지. 일회용 비닐장갑이 있으면 좋을 텐데 당연히 없다. 앗 그런데 실도 없다. 캐리어 속에서 찾은 비상용 밴드와 고무줄로 묶어 주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어떻게든 되는구나.
다음 날 우리들 예쁜 손. 어설프게 했는데 정말 물이 들었네? 여행 와서 봉숭아 물들인 손으로 다니는 기분이 꽤 신난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다.
"손톱의 봉숭아 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첫째가 "정말이요?" 갸우뚱하며 흐뭇하게 손톱을 바라본다. 내가 뱉은 말 때문인지 내 발간 손톱은 실제로 첫눈 오는 날까지 남아 있었다. 손톱 기르는 걸 싫어하지만 새끼손톱이라 좀 길어도 귀엽게 봐줄 만했다. 아이들의 작은 봉숭아 물 손톱은 모두 잘려나갔지만 발톱에는 늦게까지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재밌다. 나의 소원이 무엇이었더라? 다시 제주살이 하는 게 소원이라 또 제주에 살러 갔을까?
동물과 곤충을 사랑하는 둘째는 숲유치원에 다닌다. 여름이 가까워오면 놀이터에서 개미 찾기 삼매경이다. 아파트의 잔디 광장에서 방아깨비, 잠자리, 나비를 잡으며 논다. 한창 곤충 좋아할 나이다.
신기한 것은 제주로 온 첫날부터 무언가 계속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첫날은 다름 아닌 사슴벌레였다. 숙소 잔디밭 한가운데 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누가 갖다 놓은 것처럼 떡하니 사슴벌레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나 잡았다. 곤충관에 가야 볼 수 있던 사슴벌레를 다름 아닌 집 앞마당에서 볼 수 있다니 신기하다. 둘째는 첫날부터 그야말로 신이 났다. 다음날 바로 다이소에 가서 잠자리채와 채집통을 샀다. (두 번째 제주살이 갈 때는 잠자리채부터 챙겼다)
아침저녁 선선해서일까, 가을이 일찍 오려는 걸까. 한여름인데 이곳저곳 잠자리가 많이도 날아다닌다. 어디를 가도 잠자리가 있기에 차에는 항상 잠자리채가 대기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고추잠자리가 많기도 하다.
"와! 잠자리다~~!!!"
잠자리 날아다니는 걸 보면 눈빛이 달라진다. 잽싸게 잠자리채와 채집통을 챙겨 밖으로 뛰어나간다. 시골 출신의 날랜 잠자리라 잘 잡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포기란 사전에 없는 아들은 잠자리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운 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이 뻘뻘 흘러내리는데 이게 그렇게 재밌을까?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사진으로 다 남기지는 못했지만 해바라기 밭을 걷다 무당벌레가 찾아오기도 하고, 창문 너머 사마귀가 나타나기도 한다. 귀뚜라미는 말도 못 하게 많이 만났고 도마뱀까지 봤다. 초록이 무성한 여름이기에 곤충들을 많이도 봤다. 매일 뭔가를 채집하는 둘째에게 물어봤다.
"제주에 잠자리 잡으러 왔니?"
"네-"
해맑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 제주에 잠자리 잡으러 왔구나.. 너만의 기쁨을 찾으러 왔구나.
바닷가를 산책하다 보면 갯강구도 많지만 이름 모를 생물들이 많기도 하다.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뭐가 잔뜩 붙어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보말이다. 제주에서 식당에 가면 보말죽이나 보말칼국수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보말이구나... 보말은 바다 고둥의 제주방언이다.
어느 날 아이들과 그 유명한 광치기 해변에 들렀다. 와- 사진으로만 보던 그 풍광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드넓은 바다에 하얀 두루미들이 물속에서 뭔가를 잡고 있다. 한가로운 풍경이다. 물이 많이 빠져 있어 슬리퍼를 벗어 들고 발을 담그러 바다로 들어갔다. 성산 일출봉을 배경으로 이리저리 거니는 기분이 꽤 신난다. 멋진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사이 아이들은 벌써 물속을 탐구하기 바쁘다. 물고기도 있는 것 같고, 다른 것들도 보이나 보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보말이 많기도 하다. 작은 소라도 보인다. 아이들이 하나 둘 보말을 잡다가 어느새 두 손 가득이 되어버렸다. 채집 좋아하는 둘째는 늘 눈에 보이기만 하면 뭔가를 잡았는데 그렇게 한참 놀다가 집에 돌아올 때 바다에 다 놓아주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엄마, 집에 가서 보말칼국수 해 먹어요!"
해맑은 눈으로 두 손 가득 보말들을 내민다. 헉. 그냥 사 먹는 게 맛있을 텐데... 어쩌다 보니 거절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런 어쩌지... 저걸 담을 통이 있던가. 잡은 보말 중에 큰 것들을 골라 다 먹고 남은 주스통에 넣고 바닷물을 담아왔다. 집에 가져오긴 했는데 우선 해감을 해야 하니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다음날 꺼내 박박 씻어 삶았다. 네이버 선생님께 여쭤보면 못할 게 없다. 몇 안 되는 보말 삶기 성공!!
앗. 그런데 껍데기 안의 삶은 보말을 쏘옥 꺼낼 수가 없다. 너무 작아 젓가락으로는 힘들다. 이쑤시개가 있으면 편하다는데 이크... 비상용 반짇고리를 찾아 바늘로 어찌어찌 보말과 작은 소라를 끄집어내고 드디어 칼국수 타이밍~! 여행에서는 라면이 최고. 칼국수 라면을 사 왔다. 라면 끓이다가 깐 보말을 넣어주면 끝- 보말 칼국수 완성~!!
사 먹는 보말 칼국수와 같은 맛난 비주얼은 아니지만 내가 잡은 거니 맛있다. 아이들은 풍덩 통째로 들어간 보말 찾기 삼매경이다. 이럴 줄 몰랐는데 삶으니 너무 조금이다. 조금 더 따올 걸 그랬나??
봉숭아 물들이기, 잠자리 잡기, 보말 칼국수 만들어먹기. 어찌 보면 별 것 아니지만 제주에 한 달 지내는 동안 했던 것들이라 특별하게 다가온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온 경험들.. 일부러 돈 내고 체험을 가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면 제주살이 중에 해보면 어떨까? 천천히 마음을 열고 여유롭게 여행하면 이런 기회가 찾아온다. 기회가 왔을 때 그냥 잡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