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가을, 큰 행사 둘이 있었다. 하나는 가을 소풍이고 다른 하나는 운동회였다. 시 외곽 유원지로 전교생들이 야외(野外) 나들이를 가는 소풍과 학교 운동장에서 학년별 청팀, 백팀 또는 홍팀으로 편을 갈라 체육대회를 여는 운동회는 어린 청춘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해방구이자 흥겨운 축제 한마당이었다.
해방구는 따분한 학교 수업에서 벗어나 평소 감춰둔 재기발랄한 끼를 열린 공간에서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다는 뜻이고, 축제는 모처럼 동급생끼리 한마음 한뜻이 되어 우정을 다지고 애교심을 고양하며 강인한 정신과 육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어머니표 김밥 도시락과 삶은 밤
소풍과 운동회 전날에는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어머니표 김밥 도시락과 과일, 과자, 음료수 따위를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밤잠을 설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고 나 또한 그랬다. 소풍과 운동회 때면 약방에 감초처럼 빠지지 않은 먹거리가 있었는데 바로 삶은 밤이었다.
삶은 밤은 맛있으면서도 불편한 점도 있었다. 삶은 밤은 일단 껍질을 벗기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고 퍼석퍼석한 식감이 달짝지근한 밤 특유의 풍미(風味)를 짓눌러 몇 개 먹고 나면 물렸다. 씹을 때 부스러지는 밤 알갱이 파편도 처치 곤란이었다.
70년대 초등학교 가을 소풍과 운동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먹거리였던 삶은 밤. ⓒPARK IN KWON
#참을 수 없는 밤껍질 까기의 무거움
삶은 밤껍질을 까려면 일단 위아래 어금니로 밤 끄트머리 부분을 깨물어 뜯은 뒤 겉껍질을 벗겨야 한다. 겉껍질은 딱딱하고 질겨 손가락으로는 벗기기가 쉽지 않아 입에 물고 한참 씨름해야 했다. 1차 관문인 겉껍질을 벗겼다고 끝난 게 아니다. 떫은맛이 나는 얇은 속껍질, 이른바 율피(栗皮)라고 하는 2차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속껍질은 손톱으로 살살 벗겨내야 하는데 깔끔하게 작업을 끝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는 앞 치아를 이용해 강제로 벗겨낼 수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떫은맛을 감수하고 속껍질 채 그냥 씹어먹기도 했다.
*어금니로 깨물어 두 동강 내기와 찻숟가락 사용하기
껍질 까는 행위 자체가 성가실 때는 이런 방법을 썼다. 어금니로 밤을 깨물어 두 동강 낸 뒤 한쪽 씩 치아의 힘으로 파먹는 식이었다. 손으로 까야 하는 불편함이 없는 대신 껍질에 달라붙은 과육 가장자리까지 온전하게 다 먹어 치울 수는 없었다.
차를 마실 때 쓰는 찻숟가락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한 손에 밤을 쥐고 밤 알갱이와 껍질 사이에 찻숟가락을 밀어 넣고 힘을 줘 떠내는 식이었다. 밤 파먹기라고 불렀는데 품이 들어가 귀찮았지만 의외로 밤 알갱이를 알뜰하게 먹을 수 있었다.
*과도로 껍질 벗기기
보다 못해 어머니가 직접 나설 때도 있었다. 과도를 집어 들고 밤껍질을 살살 달래가며 벗겨내는 방법인데 시간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 효용성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머니도 썩 내켜 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삶은 달걀도 소풍이나 운동회 때 빠지지 않은 별미였다. ⓒPARK IN KWON
#삶은 달걀과 김밥
삶은 달걀을 까먹는 재미도 쏠쏠했고 단무지, 시금치, 달걀 지단, 우엉, 당근, 어묵, 소시지 등을 김에 말은 김밥 하나를 집어 먹고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점심 식사 후 펼쳐지는 장기 자랑이었다. 장기 자랑에는 푸짐한 상품이 부상으로 걸려 있어 아이들이 감춰둔 비장의 필살기(必殺技)를 선보이는 무대였고 동료들이나 선생님들 모두 환호하는 시간이었다.
#소풍의 하이라이트 장기 자랑
자칭 가수라며 한껏 으스댄 채 남진(1946~)의 ‘님과 함께’(1972년 발표)를 그럴싸하게 부르는 아이, 70년대 슬랩 스틱(몸 개그)의 일인자 ‘비실이’ 배삼룡(1926~2010)의 개다리춤을 선보이는 아이, 장소팔(1922~2002)-고춘자(1922~1994) 콤비의 재기 넘치는 만담(漫談)을 흉내 내는 아이, 백남봉(1939~2010), 남보원(1936~2020)의 성대모사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아이…….
장기 자랑 시간은 환호와 박수갈채, 응원과 격려의 함성이 메아리쳤고 틀에 박히고 하지 말라는 억압과 구속에 짓눌린 아이들이 모처럼 자유를 만끽한 신바람 세상이었다.
선생님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심사 끝에 수상한 아이들은 학용품을 한 아름씩 받아 든 채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소풍의 피날레, 보물찾기
소풍의 피날레는 보물찾기 게임이었다. 선생님들이 상품(商品) 이름을 적은 종이쪽지를 군데군데 숨겨두면 아이들이 우르르 찾아 나섰는데 종이쪽지를 발견한 아이는 해당하는 상품을 경품(景品)으로 받았다. 보물찾기의 경품도 장기 자랑과 마찬가지로 학용품이었다.
아득한 옛날, 초등학교 소풍과 운동회 때 손으로 집어 먹었던 김밥은 지금도 존재감이 크고 앞으로도 그럴 간편식의 대명사다. ⓒPARK IN KWON
#가을 운동회와 만국기(萬國旗)
가을 운동회는 전교생이 한데 어우러진 화합의 대축제이자 신나는 잔치마당이었다. 1년 중 날씨가 가장 청명한 10월에 열리는 운동회는 말 그대로 평소 갈고닦은 건강미와 운동 실력, 동료들과의 협동 정신을 뽐내는 시간이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형형색색의 만국기가 줄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청팀, 백팀, 또는 홍팀으로 나눈 머리띠를 동여맨 채 똑같은 체육복을 입었다. 운동회에는 학부모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까지 총출동했고 동네 주민들까지 몰려들어 학교 행사를 넘어 작은 지역 축제나 다름없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행사에 등장한 세계 각국의 국기인 만국기는 학생과 교사로 대표되는 학교 구성원을 비롯해 학부모와 친지, 지역 주민까지 아우르는 거교적(擧校的) 화합을 도모하는 평화적 축제라는 운동회 본연의 정신을 상징하는 표식(標式)이었다.
#개인종목과 단체종목
오전부터 시작하는 운동회는 개인종목과 단체종목으로 나눠 실력을 겨뤘다. 화합의 대축제라는 운동회 취지에 어울리게 개인종목보다는 단체종목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개인종목은 빨리 달리기와 씨름 정도가 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빨리 달리기는 운동장 한 바퀴를 가장 빨리 달리는 승부였는데 반(班)별로 학생 전원이 몇 개 조로 나눠 참가하는 게임과 학급 대표끼리 겨루는 학급 대항 게임이 있었다.
단체종목은 공 굴리기, 이어달리기, 줄다리기, 기마전(騎馬戰), 이인삼각(二人三脚) 게임, 공중에 매달린 바구니에 콩주머니를 던져 넣는 콩주머니 넣기, 콩주머니를 던져 높이 매단 박 터뜨리기, 단체 줄넘기, 상대편이 던진 공에 맞으면 아웃 되는 피구, 배구, 축구 등이었다.
공 굴리기, 이인삼각 경기가 벌어질 때는 학부모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과일은 운동회 점심시간 때 가족끼리 둘러앉아 맛나게 먹었던 후식(後食)이었다. ⓒPARK IN KWON
#아이들이 제일 좋아한 점심시간
오전 프로그램이 끝나면 점심시간인데 가족들은 운동장 곳곳에 삼삼오오 돗자리나 신문지를 펴고 모여 앉았다.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과 삶은 밤, 과일, 과자, 음료수 등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이때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는 담임 선생님 도시락도 학생들이 준비했는데 대개 학급 반장 어머니가 떠맡았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와 시상식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종목은 학교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주로 이어달리기나 기마전이었다. 운동회의 꽃인 만큼 이어달리기와 기마전 때에는 아이들의 함성(喊聲)이 학교 바깥으로까지 울려 퍼졌고 가족들의 응원전도 치열했다.
운동회는 오후 느지막이 시상식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개인종목 시상과 단체종목 시상이 끝나면 아이들 손에는 노트 묶음이나 연필 한 다스, 필통, 색연필 세트, 물감 도구 따위가 쥐어져 있었다.
소풍은 체험 학습, 운동회는 체육대회로 명칭이 바뀐 지 오래고 두 행사의 풍경도 예전과는 판이해 반세기(半世紀)라는 세월의 무게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