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개천이 놀이터이던 시절 잠자리 사냥보다 아이들이 더 즐거워하고 행복해한 겨울철 놀이가 있었다. 그 놀이 또한 개천이 아이들에게 선사한 선물이었는데 이름하여 썰매 타기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잠자리 사냥이 개천에서 즐긴 여름방학 최고의 아이들 소일거리였다면 썰매 타기는 동심(童心)을 사로잡은 겨울 레포츠의 대명사였다. 잠자리 사냥이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스릴감을 만끽하는 곤충 포획 게임이었다면 썰매 타기는 혹한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시종일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썰매와 한 몸이 된 빙판 위 아이들의 최애(最愛) 오락이었다.
얼음 썰매와 한 쌍으로 된 썰매 스틱. ⓒPARK IN KWON
#빙판의 제왕을 꿈꾼 아이들
70년대 겨울은 추웠다. 본격적으로 한파(寒波)가 몰아닥치면 동네 개천도 꽁꽁 얼어붙었다. 개천이 얼기 시작하면 아이들 세상도 막이 올랐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 놀이 도구는 썰매였다. 내가 산 동네에서는 썰매를 앉은뱅이 스케이트라 불렀다. 겨울 한철 아이들은 저마다 빙판의 제왕임을 자처했고 개천을 가로지르는 썰매 빨리 달리기로 날마다 진검승부를 펼쳤다.
그 시절 얼음 썰매 타기는 아이들이 열광한 겨울나기 최고의 인기 놀이였다. 승부 욕구에 불탄 아이들의 속마음은 더 우수한 썰매 제작 욕심으로 드러났다. 아버지나 형에게 썰매를 만들어달라고 조르는 아이, 철삿줄보다 얼음판에 더욱 친화적인 쇠붙이 날을 손에 넣기 위해 몇 날 며칠 용돈을 아끼는 아이, 썰매 날을 연탄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 날카롭게 벼리는 아이, 아예 두 개의 썰매를 뚝딱 만들어 번갈아 경주(競走)에 나서는 아이…….
썰매왕이 되고픈 아이들의 경쟁심은 끝이 없었다. 아버지한테 썰매 만드는 법을 배운 나는 집 마당에서 혼자 나만의 썰매, 애마(愛馬)를 제작했다. 나의 애마는 두 대였다. 철물점 아저씨가 특별히 골라준 굵직하고 튼튼하게 생긴 철삿줄을 장착한 썰매 하나와 형이 물려준 스케이트형 썰매를 새로 고친 썰매였는데 성능이 꽤 괜찮아 내기 승률도 만족스러웠다.
얼음 썰매를 뒤집은 모습. ⓒPARK IN KWON
#얼음 썰매 타기의 ABC와 묘미
빙판 위를 쏜살같이 내달리는 얼음 썰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질주 본능이었다. 오로지 빠른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것이 썰매 타기의 ABC이자 전부였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이들이 빙판 썰매 타기에서 쟁취하는 묘미(妙味)는 바람을 가르는 속도감에서 오는 쾌감과 상대를 이겼을 때 느끼는 짜릿한 성취감, 매서운 추위를 한방에 떨쳐버리는 스트레스 해소로 요약할 수 있다.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초등학교 겨울방학만 되면 하루가 멀다고 썰매를 들고 개천으로 출동했다.
#얼음 썰매 만들기
얼음판 위를 쌩, 하고 빠른 속도로 지쳐야 하는 썰매 타기에서 장비의 우수성이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썰매를 다루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빙판 위를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체는 썰매에 장착된 철삿줄과 블레이드라고 불리는 스케이트 날처럼 생긴 쇠붙이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썰매를 돌진하게 하는 장치인 철삿줄과 쇠붙이 날을 갈고 다듬어 빙판과 최상의 궁합이 이루어지도록 정성을 쏟았다. 아이들이 썰매 만들기에 목숨을 건 것도 다 그런 까닭에서였다.
얼음 썰매 안쪽을 비스듬히 세운 모습. 썰매 날이 보이는데, 옛날 썰매 날보다 각목 바깥으로 돌출된 날 부위가 좁다. ⓒPARK IN KWON
*얼음 썰매의 구조
썰매의 구조는 앉는 자리인 판자와 판자 양옆 아래에 고정하는 각목, 각목 밑에 홈을 파 설치하는 철삿줄 또는 쇠붙이 썰매 날로 이뤄진다. 여기에 더해 쇠꼬챙이나 대못을 아래에 박은 둥근 막대기 스틱도 따로 만들어야 한다.
둥근 막대기 스틱은 썰매 추진체인 철삿줄과 쇠붙이 날이 제 몫을 다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보조 도구다. 스틱 밑에 달린 쇠꼬챙이나 대못이 빙판을 찍고 나서야 비로소 썰매의 전진이 가능한 동력(動力)이 썰매 추진체에 전달된다. 쇠꼬챙이와 대못, 빙판은 찍고 찍히는 관계이지만 스스로는 독립적인 존재감을 발휘할 수 없고 서로 협업을 통해서만 썰매의 질주를 이끌 수 있다.
썰매 제작에 필요한 판자와 각목은 동네 목공소 마당에 버려진 나무를 주워 만들었고, 철삿줄과 쇠붙이 날은 철물점에서 돈을 주고 샀다. 집에 있는 톱과 망치로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았고, 판자와 각목의 거친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사포(砂布)는 문방구에서 구매했다.
얼음 썰매 제작에 필요한 망치, 톱, 펜치, 대못, 사포 등 공구들. ⓒPARK IN KWON
*철삿줄과 쇠붙이 날을 장착하는 방법
-철삿줄 썰매는 톱으로 각목 가운데를 위에서 아래 끝까지 얕게 썰어 홈이 패게 한 뒤 그 위에 철삿줄을 놓고 철사 양옆 여러 군데에 못을 박아 고정했다.
-쇠붙이 날 썰매 역시 각목에 약간 깊게 홈을 만들고 그 위에 쇠붙이 날을 대고 망치로 살살 두들겨 안쪽으로 자리를 잡게 한 다음 센 망치질로 깊숙이 박아 넣은 뒤 좌우 수평 균형을 맞춰 마무리 짓는다.
쇠붙이 날을 장착한 썰매는 철삿줄 썰매보다 얼음판 위를 달리는 힘과 속도감이 뛰어나 아이들과의 내기 시합에서 유리했지만, 바닥에서부터의 높이가 높아 가속도가 붙으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위험이 있어 숙련된 조종술이 필요했다.
스틱을 얼음판에 힘차게 내리찍으며 몸을 밀면 쉭쉭, 빙판이 깎이는 소리가 나며 전진하는데 이때부터 얼음 썰매 타기의 신바람이 시작된다.
대못을 박아 넣은 얼음 썰매 스틱. ⓒPARK IN KWON
#얼음 썰매의 조종 기술
썰매를 타는 아이의 운전 솜씨가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도 틀림없다. 운전 솜씨는 썰매에서 떨어지지 않게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균형감각, 스틱으로 얼음판을 찍고 나가는 순발력과 지구력, 상체와 하체의 힘을 스틱과 썰매에 실어 나르는 운동신경 등을 말한다. 특히 곡선 주로(走路)에서 가속도를 이기지 못해 개천 가장자리로 이탈하거나 조종 기술 미숙으로 나자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얼음 썰매 타는 자세
썰매를 탈 때 아이들은 양 무릎을 꿇거나 발바닥을 짚고 무릎을 구부려 앉거나 책상다리 자세를 취했다. 썰매 타는 자세는 아이들 취향에 따라 다 달랐다. 발바닥을 짚고 타면 하체 힘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어 속도를 내는 데 유리했으나 자칫 몸의 균형이 흐트러져 넘어질 위험이 있었다.
책상다리 자세는 가장 안정적이나 하체 힘을 살릴 수 없어 속도 싸움에서 불리했고 오래 타면 허리에 부담이 가 지치기 쉬웠다. 양 무릎을 꿇은 자세는 양반다리 자세보다 속도가 빨랐지만 한, 두 바퀴 돌고 나면 다리에 쥐가 났다.
#얼음 썰매 즐기는 방법
썰매를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내기를 걸고 전력 질주하는 게임을 선호하는 아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혼자서 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도 적지 않았다. 썰매를 다루는 기술이 능숙지 못한 아이들은 서로 번갈아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밀어주는 방법으로 상부상조했다.
썰매를 한참 타다 보면 개천 둑 한구석에서 폐고무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났고 그 주변으로 추위에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는 아이 여럿이 모여 있었다.
#얼음 썰매 체험장
얼음판 위를 지치는 얼음 썰매 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아득하다. 요즘에도 얼음 썰매 체험장에 가면 얼음 썰매를 즐길 수 있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얼음 썰매도 유통된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아파트 옆 눈 쌓인 언덕길 위에서 플라스틱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는데 눈썰매 장면이다.
추위가 지금보다 더 독했던 70년대 겨울, 동네 개천에서 깔깔대며 얼음 썰매의 황홀경에 빠졌던 또래 친구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