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창고 추억여행

68.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⑧민화투(花鬪) 놀이

by 박인권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⑧민화투(花鬪) 놀이


#딸의 깜짝 제안

2023년 초여름 오랜만에 네 식구 모두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 일이다. 2박 3일 일정으로 강릉을 찾은 첫날 밤 숙소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던 중 딸아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빠, 심심한데 고스톱이나 칠까?” 깜짝 놀란 나를 본 딸은 고등학교 때 기숙사 친구들과 장난삼아 화투를 배웠는데 서툴게 칠 줄 아는 정도라고 했다. 내가 놀란 이유는 잡기(雜技)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였던 딸이 느닷없이 화투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평소 식구들끼리 고스톱을 친 기억이 거의 없고 내가 고스톱을 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초반 끗발은 개 끗발

집사람과 딸, 셋이 자리를 잡고 화투(花鬪)판을 벌였다. 본인 말대로 딸은 화투패(牌)를 섞는 동작이 어설펐고 규칙에 대한 이해도 어렴풋이 아는 정도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손놀림과 달리 딸의 초반 끗발은 물이 올랐다. 신바람이 난 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초반 끗발은 개 끗발이라고, 딸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 판을 내리 이긴 딸은 운빨이 다했는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패를 돌리는 족족 헛심만 쓰고 말았다. 화투판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유쾌하게 파장(罷場)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를 어릴 때 화투를 배웠다. 잘 치는 화투도 아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화투를 만진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화투판에 끼는 것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아서인데 순전히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각각의 달을 상징하는 그림 4장씩 짝을 이룬 48장의 화투패. 왼쪽 위에서부터 1월~6월, 오른쪽 위에서부터 7월~12월. ⓒPARK IN KWON


#오락 화투와 내기 화투

화투 치는 사람들은 대개 오랜 시간 책상다리 자세로 허리를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데 나는 이 자세가 불편하다. 몇 차례 패가 오고 가고 시간이 흐르면 그다지 흥도 나지 않을뿐더러 온몸이 욱신거리고 좀이 쑤셔 견디기가 힘들다. 아주 가끔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재미 삼아 즐기는 오락 화투는 몰라도 장시간 내기 화투판은 비생산적 악다구니 게임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회사 다닐 때 화투를 즐기는 동료들 얘기를 들어보면 화투판은 어김없이 끝장 승부로 흐르다 막판에는 꼭 서로 얼굴을 붉히며 볼썽사납게 끝난다는 것이다. 희한한 것은 분명 두 번 다시 서로 안 볼 것처럼 씩씩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며칠 사이 또 내기 화투로 의기투합하고 싸우는 일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내가 직접 본 장면도 여럿 있어 틀린 말은 아닐진대 화투 꾼들은 화투판 싸움을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위에서부터 남약 또는 초약, 풍약, 비약. 각각 20점의 점수가 걸려있다. ⓒPARK IN KWON


#할머니와 화투

나는 1970년대 초 할머니한테 화투를 배웠다.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다. 그때 할머니는 경북 상주 큰아버지 댁과 우리 집을 번갈아 오가며 머물렀다. 할머니는 혼자 화투판을 펼쳐 놓고 운수 띠기로 당신의 운세와 피붙이들의 운세를 맞춰보곤 했었는데 그 모습을 신기해한 나와 형들도 화투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다.

할머니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 형제들은 화투 놀이를 궁금해했고 자연스레 화투 치는 법을 알게 됐다. 화투(花鬪)의 한자어를 직역하면 꽃싸움인데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꽃이나 나무, 새, 동물, 풍경 그림이 4장씩 짝을 이룬 플라스틱 재질의 직사각형 딱지 48장이 한 세트다.


위에서부터 홍단, 초단, 청단. 각각 30점의 점수가 걸려있다. ⓒPARK IN KWON


#민화투의 규칙과 게임 방법

우리가 할머니한테 배운 화투 놀이는 지금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민화투라는 가장 기본적인 게임이었다. 널리 알려진 고스톱에 비해 규칙과 요령이 간단해 배우기 쉬웠다.


낱장의 패가 맞아떨어진 민화투의 점수 나기 종류는 비 그림, 단풍 그림, 난초 그림 네 장을 각각 확보한 비약(비約), 풍약(楓約), 남약 또는 초약(草約), 흑싸리, 홍싸리, 난초 다섯 끗 자리 띠로 이뤄진 초단(草短), 송악, 벚꽃, 매화 띠로 된 홍단(紅短), 모란, 국화, 단풍 띠로 된 청단(靑短) 여섯 가지였다.


게임 방법은 2명이 맞붙으면 바닥에 패를 드러낸 바닥 패 8장에 10장씩 손 패를 쥐고 했으며 3명인 경우에는 바닥 패 6장, 손 패 7장, 4명은 바닥 패 8장에 손 패 5장씩을 들고 승부를 겨뤘다.


둘이 민화투를 치면 바닥 패 8장에 손에 든 패 10장씩을 들고 게임을 한다. ⓒPARK IN KWON


*점수 계산 방법과 난 점수

점수 계산 방법은 약(約)을 하면 20점, 단(短)을 하면 30점이었고, 피 0점, 띠 5점, 열 끗 10점, 광(光)은 20점이었다. 약과 단을 한 사람은 약값과 단값을 상대에게서 받아 자기 패에 더해 점수가 금방 높아졌다.


특이한 점은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본(本)이라고 하는 기본점수가 있었는데 각자가 획득한 점수에서 기본점수를 뺀 점수가 높은 사람이 승자가 됐다. 기본점수는 2명이면 120점, 3명은 80점, 4명은 60점이었다. 각자 얻은 점수에서 기본점수를 덜어낸 점수를 ‘난 점수’라고 했고, 해당하는 사람은 “났다”라고 소리쳤다.


2명이 하는 게임에서 한 사람이 130점을 얻어 이겼다면 기본점수를 뺀 10점에 대한 보상을 받는데 보통 5점당 얼마, 이런 식으로 정했다.


먼저 난 사람이 중간에 스톱을 선택할 수 있는 고스톱과 달리 패가 다 돌아야 승패가 결정되는 것도 민화투만의 특징이었다.


넷이 민화투를 칠 때는 바닥 패 8장에 손에 든 패 5장씩을 쥐고 승부를 겨룬다. ⓒPARK IN KWON


#형제들의 음모(陰謀)

형제가 모두 집에 있는 날, 우리는 할머니와 민화투를 가끔 쳤고 ‘난 점수’ 5점당 1원씩을 걸었다. 화투를 치다 말고 할머니는 한 번씩 변소(便所)를 다녀오곤 했는데 이 순간은 우리 형제들이 뻔히 속 보이는 음모(陰謀)를 꾸미는 시간이었다. 음모는 할머니가 없는 동안 화투 낱장의 끗수가 보이지 않도록 바닥에 뒤집어 쌓아 놓은 더미 패(牌)의 순서를 우리 형제들 패와 짝이 맞도록 조작하는 것이었다.


승부는 보나 마나, 화투판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속수무책으로 허탕만 쳤고 할머니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 일은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 참, 이상하네” 하며 혀를 끌끌 찰 뿐 내색하지 않았는데 실은 손자들의 장난기 가득한 작당(作黨) 모의(謀議)를 다 알고도 모른 채 한 사실을 얼마 안 가 알게 됐다.


아득한 옛날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알고도 속아준 할머니의 품이 그립다. 그때 70대 중반이었던 할머니는 10년 후 우리 곁을 떠났다. 삼가 할머니의 명복(冥福)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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