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Ⅱ
19. 피터 폴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피터 폴 루벤스(1577~1640)
우리가 즐겨 먹는 흔한 과일 사과. 그러나 사과는 인류 역사를 뒤흔드는 문제의 과일로 여러 번 등장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가정 먼저 떠오르는 게 뱀의 유혹에 빠져 사과를 따 먹는 원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인류가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를 들 수 있겠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영감을 얻었다는 뉴턴의 사과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우뚝 서게 한 사과 정물화도 사과 관련 일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급기야 사과는 전쟁의 발단이 되는가 싶더니, 결국 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기까지 했다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과가 맞나 싶다. 바로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 피터 폴 루벤스의 그림 ‘파리스의 심판’에 등장하는 사과다.
루벤스가 1632년에서 1635년 사이에 그린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빼어난 미모의 세 여신을 배경으로 삼았다. 아프로디테(비너스)와 헤라(주노), 아테나(미네르바) 세 명의 여신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가를 결정할 선택권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넘어갔다. 황금사과를 거머쥘 운명의 주인공을 놓고 고민하던 파리스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선물로 약속한 아프로디테를 낙점하는데…… 아뿔싸, 황금사과를 안긴 보상으로 품게 될 여인은 다름 아닌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가 아니던가!
피터 폴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참나무에 유채, 144.8 x 193.7cm, 1632-1635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졸지에 아내를 뺏긴 메넬라오스가 가만있을 리 없을 터. 메넬라오스는 대규모의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침공한다. 이것이 바로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12세기 사이에 벌어진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다.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됐고 트로이의 목마 계략에 속은 트로이의 패망으로 끝났다. ‘파리스의 심판’의 모티브가 된 그리스 신화 속 황금사과 이야기는 루벤스뿐 아니라 많은 화가가 작품의 소재로 삼은 단골 메뉴로 잘 알려져 있다.
1577년생인 루벤스의 고향은 지금의 벨기에 제2의 도시 안트베르펜(앤트워프)이다. 63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곳도 안트베르펜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독일 서부 베스트팔렌주의 지겐이다. 루벤스가 태어날 당시 법학자였던 부친이 정치적인 이유로 독일 망명 생활 중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바로크미술을 빛낸 궁정화가 루벤스는 그림을 그리는 본업(本業) 외에도 해박한 인문학적 소양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한 당대의 유명인사로 이름을 날렸다. 왕실 소속 화가이면서 본인의 대규모 공방을 직접 운영할 정도로 유럽 각국의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루벤스는 다작(多作)으로도 유명하다. 초상화와 풍경화, 역사화, 종교화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쉼 없이 그렸는데 힘이 넘치고 웅장한 구성과 실제 사물을 보는 듯한 탁월한 표현력, 화려한 색채, 관능적인 묘사 등이 돋보인다.
특히 23살 때인 1600년 무렵, 이탈리아로 떠나 8년 동안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 제노바 등 각지를 여행하며 그리스 ‧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집중적으로 접하며 화가로서의 역량을 다졌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8명의 자식을 둔 루벤스는 가정적으로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병인 통풍에 시달리다 1640년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
대표작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동방박사의 경배’,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 ‘술 취한 헤라클레스’, ‘미의 세 여신’ 등이 있다.
파리스의 심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 중인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신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세 여신이 저마다 ‘내가 최고 미인’이라며 간택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다. 맨 왼쪽에서부터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가 육감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 그림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자다. 파리스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이 황금사과다. 세 여신 중 누가 황금사과의 주인공이 될까? 눈썰미 있는 사람은 벌써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런데 세 여신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미모 경쟁을 하게 된 걸까? 사건의 발단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미르미돈족의 왕 펠레우스의 결혼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대한 결혼식답게 내로라하는 신들이 초대됐는데, 초대받지 못한 신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에리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주노라’고 적힌 황금사과를 피로연장에 슬쩍 던져 넣어 장차 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갈 세 여신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신들의 왕 제우스는 고민 끝에 파리스에게 황금사과를 건넸다. 헤라는 제우스의 여동생이자 정실부인, 아프로디테와 아테나는 제우스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을 지배할 권력을 약속한 헤라와 전쟁에서 승리할 지혜를 보장한 아테나를 제치고 아프로디테가 미의 여왕 자리에 오르는데, 그 이후의 결과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다.
그림을 자세히 보자. 왼쪽에서 두 번째 아프로디테가 파리스를 쳐다보며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하고 있다. 그 오른쪽의 헤라의 시선도 파리스를 향하고 있다. 그런데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녀에게 황금사과를 건네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아프로디테가 승리한 것이다.
세 여신의 실체는 그림 속 여러 대상에 숨은 내용이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인 도상학(圖像學)으로도 해석된다. 먼저 그림 맨 왼쪽에 보이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 오른발 옆으로 투구가 놓여 있고, 그 위로 메두사 장식의 방패, 또 그 위로 올빼미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모두 아테나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아테나 옆에 서 있는 여신은 봄의 여신 아프로디테. 그림 맨 왼쪽 아래에 화살통을 메고 날개 달린 모습을 한 아기가 그녀의 아들 에로스다. 에로스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의 옷이다. 마지막으로 그림 가운데 여신의 발 앞에 화려한 무늬가 돋보이는 공작새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헤라임이 틀림없다.
맨 오른쪽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황금사과와 지팡이로 미루어 파리스가 확실하다. 파리스 옆의 남자는? 날개 달린 모자와 왼손에 쥐고 있는 뱀 형상의 지팡이로 볼 때 전령의 신 헤르메스임을 알 수 있다. 헤라의 머리 위로 실루엣처럼 보이는 인물이 ‘불화의 신’ 에리스라는 주장도 있다. 참나무 판에 유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세로 144.8cm, 가로 193.7cm 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