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Ⅱ
20. 밀레, 만종(晩鐘)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이발소(理髮所)는 남자들이 머리를 깎는 곳이다. 미용실을 이용하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이름이겠지만, 중장년의 남자들에게 이발소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오는 장소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곳곳에 흔한 게 이발소였으나, 지금은 변두리 지역에서나 드문드문 볼 수 있으니 세월이 변해도 정말 많이 변했다.
이발소 전성기 시절, 그곳에 가면 눈길을 끄는 복제 그림이 하나, 둘쯤 걸려 있었는데 대표적인 게 밀레의 그림이다. 작가 이름이나 제목은 몰라도 ‘아하, 이 그림’하고 맞장구를 칠 정도로 너무나도 친숙한 작품이다. 바로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이다.
밀레가 1857년부터 1859년 사이에 그린 이 그림은 가난한 농부가 아내와 함께 해가 질 무렵 들판에 서서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맞춰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씨 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는 여인들’(1857)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사실주의적 혹은 자연주의적 농민 풍경화의 걸작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캔버스에 유화, 55.5 x 66cm, 1857년 - 1859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의 그레빌 아그에 위치한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 농촌에서 나고 자란 밀레는 누구보다 농민들의 삶을 진한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이런 성장 과정은 훗날 그가 ‘농민의 화가’로 명성을 쌓는 데에 소중한 토양이 되었다.
밀레는 파리 교외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사실적 풍경화를 그린 화가들을 지칭하는 바르비종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19세기 중엽 밀레와 함께 테오도르 루소, 카미유 코로, 프랑수아 도비니, 쥘 뒤프레, 샤를 자크 등 수십 명의 화가가 이 마을에 모여 살았는데, 인근에 퐁텐블로 숲이 있어 퐁텐블로파로도 불린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눈앞에 보이는 숲과 자연 등 자연 친화적이면서 사실적인 풍경화에 탐닉한 것과 달리 밀레는 농민들의 삶과 농촌 풍경을 소박하지만 숭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건한 필치로 묘사한 점이 차이다.
20대 초반, 파리 땅을 밟은 밀레는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미술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루브르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화가로서의 내공을 다져나갔다. 밀레의 또 다른 걸작인 ‘이삭줍는 여인들’도 ‘만종’을 그리기 시작하던 해인 1857년에 탄생했다. 저물어가는 노을빛 아래 드넓은 들판에서 추수 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담은 자연주의를 지향한 대표적인 그림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캔버스에 채색, 84 x 111cm, 1857, 오르세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반 고흐의 초기 작품과 클로드 모네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끼친 밀레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9명의 자식을 뒀으며 1875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1살 때였다.
만종(The Angelus)
농촌 출신으로 농부의 삶을 꿰뚫고 있는 밀레는 아마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화가 중 한 명일 것이다. 밀레의 대표작 ‘만종’도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한번은 봤을 정도로 친숙한 그림이다. 그림의 주인공이 농부와 그의 아내라는 점, 노을이 지는 황혼 무렵의 들판을 배경으로 설정한 점은 한국인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저 멀리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맞춰 생명의 원천인 대지의 축복에 감사기도를 드리는 두 사람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하루 농사를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 나아가 흙을 만지고 밭을 일구는 노동의 신성함을 느끼게 하는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남자의 왼편으로 금방이라도 흙냄새가 날 것 같은 생명력 넘치는 땅에 꽂힌 쇠스랑과 부부 가운데에 놓여 있는 감자 바구니, 여자 뒤에 보이는 곡식을 실어 나르는 손수레도 가난하지만 비루하지 않은 농민의 정직한 삶을 대변한다.
이 작품의 착상은 종소리만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늘 기도를 드렸다는 밀레 할머니의 모습에서 비롯됐다. 밀레가 실제로 밝힌 얘기다. 작품의 제목을 해거름 교회나 절에서 치는 종이라는 뜻의 ‘만종’으로 정한 것도 그런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이 그림은 보는 순간 편안하고 은은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그림이다.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프랑스 국민의 ‘만종’에 대한 애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화, 101.6 x 82.6cm, 1850, 보스턴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랑스인들의 각별한 ‘만종’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실제 사례가 있다.
미국인 부호(富豪)의 주문으로 그리게 된 ‘만종.’ 그러나 의뢰인은 완성된 그림을 구매하지 않았다. 1875년 밀레가 죽은 뒤 밀레의 작품은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만종’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 전시 후 경매에 출품됐다. 프랑스와 미국, 두 나라는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를 펼쳤고 미국미술협회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듬해 프랑스 유통업계의 실력자 알프레드 쇼사르가 당시 80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만종’을 프랑스로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만종’은 프랑스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쇼사르의 바람에 따라 1909년 루브르박물관에 기증된 데 이어 1986년부터 오르세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만종’과 관련된 또 다른 화제 하나. 초현실주의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만종’을 처음 본 순간, 그림 속 감자 바구니는 감자 바구니가 아니라 죽은 아이를 품은 관(棺)이며 부부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달리의 이 주장은 사실일까? 1932년, 한 정신이상자가 ‘만종’ 작품에 칼로 상처를 내는 바람에 복원을 위한 X선 검사가 시행됐다. 그 과정에서 감자 바구니 밑에 관처럼 생긴 이상한 물체가 밑그림으로 발견됐다.
호사가들은 달리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난 증거라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땅속에 묻힌 밀레가 증언하지 않는 한, 입증 자체가 불가해 달리 특유의 초현실적인 감상평 정도로 여겨진다. 세로 55.5cm, 가로 66cm의 아담한 크기로 캔버스에 유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