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일라 Jan 04. 2022

왜 그렇게 블로그를 열심히 했을까?

기록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자네들 일기는 쓰나?"


하여간 유명 하디 유명한 국내 대기업 몇 군데에서 임원까지 지내신 교수님이었다. 원래 본 전공이 생물학이었고 17살 때부터 이과의 길을 걸어온 나는 친구들이 취업의 길을 찾아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많이들 선택하길래 나도 복수전공으로 신청해서 듣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타과 학생이다 보니, 어떤 교수님 수업을 들어야 할지 잘 몰랐고, 그렇게 나는 "재수 없게" 무섭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교수님의 강의를 어쩔 수 없이 듣게 됐다. 휴학을 한 직후에 들었던 강의였던지라 내 학구열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고, 나는 이 어렵다고 소문난 강의에서 꼭 좋은 점수를 받아야겠다는 오기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반장을 자처했고, 생전 팔자에도 없던 반장을 하게 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앞자리에 앉았다. 교수님은 항상 진도를 칼같이 빼시는 분이었는데, 진도가 조금 여유롭다 싶으시면 간간히 당신이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 여담 시간이구나 하고 머리에 있는 스위치를 딱 내려버렸을 나였지만, 그 질문이 내 관심을 끌었다.


"매일매일 어떻게 생활하는지 다들 계획표 작성은 하지?"


대답이 시원치 않자, 교수님은 '그래, 봐줬다. 솔직히 이 정도는 하겠지.' 하는 뉘앙스로 다시 물었다.





"자네들 일기는 쓰나?"




경영학을 듣는 동안 항상 친구들이 "경영학에선 도대체 뭐 배워?"라고 물으면 난 항상 "몰라,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 가르쳐."라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로 교과서에 나와있는 별의별 이론이나 가설 등의 상당수는 시험지를 제출하는 순간 내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하지만 졸업한 지 6년이 지난 지금도 살면서 간간히 경영학 수업시간에 배운 교훈들이 떠오른다.


그 깐깐한 교수님이 가르치셨던 과목은, 죄송하게도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성적증명서를 떼서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본다면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정말이지 배운 내용들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교수님이 "자네들 일기는 쓰나?"라는 질문을 던지신 후, 아무도 이렇다 할만한 반응을 하지 않았을 때 지으셨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에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L사의 누구 회장은 어떻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S사의 누구 임원은 블라블라.. 이 교수님이 아직도 교편을 잡고 계시다면, 어쩌면 지금 세대의 아이들에게는 꼰대 소리를 듣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록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교수님은 몇 번이고 다음 문장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기록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이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은 PT를 받으면서였다. 당시 학교 앞에 헬스장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꽤나 비싼 돈을 주고 PT를 받았다. PT선생님은 내게 표가 몇 개 그려진 A4용지 몇 장을 쥐어주셨다. 거기에 하루에 먹은 모든 것들을 적으라고 했다. 물 한 모금까지도 모조리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공복에 화장실을 한번 다녀온 후 바로 잰 몸무게도 적으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 달 반 만에 13kg를 감량했다.


적으니까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내가 규칙적이지 않게 먹고 있었는지, 

얼마나 균형이 무너진 식단을 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물을 안 마셨는지, 

얼마나 운동을 안 했었는지.


적으니까 보이기 시작했고, 보이기 시작하니까 바꿀 수 있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뇌리에 스쳤다.




이 교수님이 내 평생의 은사님도 아니고, 그냥 강의 딱 한번 들었을 뿐이었던지라 항상 이 교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삶의 길 중간중간에서 이 교수님 말씀이 떠오르는 때가 많다. 내가 오랜 시간을 들여도, 여러 번 노력해도 쉽게 바꾸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할 때면 "기록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라는 그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물론 주먹구구로도 변화할 수 있다. 기억력이 좋다면 기억에 의존하고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록을 하면 통계를 낼 수 있다. 통계를 낼 수 있으면 변화한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지난 주보다, 지난달보다, 지난 분기보다 어떻게 달라졌는지, 나아지고 있는지 나빠지고 있는지, 나아진다면 얼마나 나아졌는지, 나빠졌다면 얼마나 나빠졌는지.


레일라 블로그

그래서 블로그를 열심히 쓴 것은 아니었지만, 블로그를 쓰다 보니 이런 것들이 쉽게 가능해졌다. 내가 영어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지 블로그를 찾아보면 나온다. 내 인생에 중요한 이벤트가 언제 있었는지 스크롤 몇 번 조금 내려보면 금방 날짜와 시간, 심지어 사진까지 찾을 수 있다. 블로그에 거의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8년 차가 되었다. 무엇하나 끈기 있게 잘하지 못하는 내가 유일하게 오랜 기간 동안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블로그에 일기 쓰기다.


내 생각을 털어놓고, 감정을 쏟아내고, 창의성을 자극하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즐거움 외에도 블로그에 적는 일기는 기록으로서 그 임무를 다한다. 내가 작년 이맘때쯤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었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과거의 나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정말 피곤해서 눈이 감기는 순간에도, 여행에 가서도 나는 일기를 쓴다.


물론 밀리는 날들이 있지만, 밀리는 것조차도 기록이 된다.


그리고 그 기록은 내 변화를 돕는다.  




Photo by Mikhail Nilov from Pexels

>>> 같이 읽으면 좋은 글

유학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창업을 해봤다.

해외 취업을 하는 방법들

교수님, 저는 실험실 나가겠습니다.

뭐든 어중간하게 잘하는 내가 해외취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저는 영국 워홀과 독일 석사 유학을 거쳐 현재 독일 바이오텍 회사에서 디지털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레일라입니다. 커리어 윙이라는 스타트업의 대표이고, 네이버에서 레일라 블로그를, 유튜브에서 레일라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워킹홀리데이, 유학, 해외취업 등 해외살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공유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wjddms4925

매거진의 이전글 유학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창업을 해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